▲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미국은 한 나라라기보다 한 대륙이라 하는 편이 낫다. 면적으로는 러시아가 훨씬 더 넓고, 인구로 치자면 중국과 인도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에 가보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실감할 수 있다. 50개의 주가 각기 웬만한 나라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에, 50개의 나라가 모여 이룬 미합중국이란 이름이 나름 일리가 있다. 캘리포니아가 독립국가라면 G7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고,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13번째 주 크기에 해당하는가 하면 남한의 면적만 따진다면 38번째 주에 불과하다.

미국을 한자로 쓸 때 한국과 중국은 ‘아름다울 美’ 자를 써서 美國이라 부른다. 영국을 꽃부리 英, 덕국은 큰 德(1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 獨으로 바뀜), 불국을 부처 佛 라고 최대한 좋은 뜻을 가진 글자로 이름붙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쌀 미’자를 써서 米國이라고 표기한다. 좀 더 사실 위주고 냉정한 이름이다. 고 리영희 교수는 未國이라고 ‘아닐 미’자를 쓰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다 보니 아직 나라가 덜 됐다고 꼬집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국의 역사가 200년 남짓이라 비교적 젊은 나라지만 아직도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감이 덜 간다. 미국은 처음으로 민주주의 성문헌법을 제정한 나라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법과 제도, 절차를 본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2차 대전을 끝내고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주도했고 소련이 망한 뒤에는 한동안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다. 최근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의 쇠락을 논하는 사람이 많지만 적어도 금세기 안에는 세계 제1의 강국이라는 지위는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우세하다.

▲ 미국 지도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국가다. 때문에 ‘인종주의자’는 모욕적인 말로 받아들인다. 민족주의와 정치이념이란 말도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물론 이보다 더 강한 금기도 있다. 미국인을 면전에서 ‘거짓말쟁이’라고 부를 경우 즉각적인 주먹다짐이나 법적 고소를 각오해야 한다. 성경의 첫 문장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데서 드러나듯 미국 문화에서 말의 정직성은 절대적 가치이고 거짓말은 도덕적 죄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국민 대다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냉담자’지만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ity)적 전통이 마음 깊이 각인돼있다. 미국의 정치외교군사사법 등 하드웨어는 그 원형을 로마에서 찾을 수 있지만 문화,예술,종교,윤리 등 소프트파워의 뿌리는 구약성경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최근 동성결혼이 연방대법원에서 합법 판결을 받았지만 9인의 대법관 가운데 5인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미국사회에서 동성애자 그룹의 로비가 워낙 강하고 정치언론학계 등 여론주도층에 진보자유주의자 세력이 과다 대표된 측면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사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나라인데 그 경계는 해안으로부터 50마일 선”이라는 말이 있다. 동부의 대서양, 서부의 태평양 연안 대도시에는 진보 자유주의 성향의 인구가 집중돼있는 반면 내륙으로 80㎞만 들어가면 보수적인 전통주의자들이 다수인 ‘메인스트리트 아메리카’ 시골이라는 것이다. 흔히 북부가 진보성향, 남부가 보수성향이라고 하지만 연안과 내륙으로 나눠보는 게 더 정확하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이민으로 이뤄진 나라고 원주민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사실상 절멸 상태다. 미국은 항상 ‘미국의 꿈’이라는 이민자의 신화를 내세웠다. 미국의 꿈은 여러 형태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미국인에게 사회적 이동성과 신분 변동성은 적실성과 무관하게 신앙고백에 가까운 명제다. 또한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이다 보니 문화적 전통과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한 공통의 도덕규범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은 누구도 수긍할 수 있는 사법절차에 의해 갈등의 해소와 이해의 조정이 이뤄지는 법치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미국이 로마의 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했지만 사법은 예외다. 미국은 보통 영미법이라 부르는 앵글로색슨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이른바 대륙법이라 불리는 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의 법률제도가 로마법의 직접적 후계자다. 영미법은 불문법, 판례 중심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세계 공통의 부족사회 관습법에 가깝다. 그러나 영국이 식민주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애초 소박했던 앵글로색슨주의는 ‘권력과 황금, 영광’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바뀌고 말았다는 지적에 공감이 간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앵글로색슨 시스템의 특징이 있다. 영미법 계통에서는 누구든 일단 진술을 액면대로 받아들여준다. 그러나 다음 어떤 계기에 진술의 모순이나 거짓이 드러나면 엄격하게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대륙법 계통은 불신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누가 관청에 찾아가 어떤 신청을 하려하면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입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민증 제시로 부족해서 주민등록 등본, 때로는 초본을 떼어서 제출해야 한다. 그것도 관청에 따라 제 각각이라 가족관계증명서를 학교에 갖다 내고 졸업증명서를 떼어다 직장에, 재직증명서와 세금완납증명를 발급받아 은행에, 경력증명을 다른 직장에 내는 등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 한번 서류를 떼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위ㆍ변조 서류가 판친다. 또 선생님의 추천서 따위는 믿지도 않는다. 교사나 교수의 평가가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 내셔널 몰(National Mall).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공원

앵글로색슨 시스템은 신뢰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뢰에서 시작하는 것뿐이지 끝까지 무조건 믿어준다는 뜻이 아니다. 1차적인 진술이나 보고를 일단 접수하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다가 추후 어긋나는 점이 있는지 확인, 불이익을 준다. 실제 사례를 보면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신혼부부가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됐는데 둘 다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다만 서류 준비의 편의상 남편이 유학생 (F-1) 비자를 받고 아내는 유학생배우자 (F-2) 비자를 발급받았다. 미국에 도착해서 남편이 대학원에 다녔고 아내도 한 학기 뒤에 등록했다. 그런데 아내가 대학원 조교로 임용된 직후 이민국으로부터 통지를 받았다. 미국에 입국할 때 유학생배우자라고 해놓고 한 학기 뒤에 학생으로 신분을 바꿨으니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에 따라 추방 대상이라는 통보였다.

그 유학생 부부는 이민국에 찾아가 “원래는 계획이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생각이 바뀐 것”이라는 내용의 청원을 해서 추방을 면했지만 앵글로색슨 시스템에 대해 큰 공부를 한 셈이었다. 즉 미국에서는 공식적인 진술을 할 때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 처음 입국할 때 공항에서 이민국 창구를 통과하는 때부터 겪게 된다. 미국에서 이민국, 경찰, 법원 등 사법관계자와 접촉할 때는 어떤 경우에도 허위사실은 물론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으면 통역을 대주는 것은 저쪽의 책임이니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순간을 모면하려고 사실이 아닌 말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정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동정을 얻으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운전하다 경찰에 적발되는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차를 세우고 미리 내려서는 안 되고 운전대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차분히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기를 꺼내는 것으로 오인해 총을 맞을 수도 있다. 실제 몇 년 전 LA에서 30대 한인 여성이 고속도로에서 경찰의 정지신호에 응하지 않고 도주하다 막다른 주차장에 몰렸는데 포위된 상태에서 빠져나가려고 차를 움직였다가 사살된 적이 있다. 당시 차 안에 젖먹이가 베이비시트 안에 뉘어져 있음에도 경찰이 총을 발사해 비난의 표적이 됐다. 내 경우 괌에 갔을 때 렌트카를 운전하던 지인이 지리를 몰라 미군기지 진입로로 들어선 일이 있었다. 차를 돌릴 수 없어 경비초소까지 갔는데 초병이 정지신호를 하자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황급히 말려서 별 탈은 없었지만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라 총기 소지가 가능하고 이에 따라 군경도 방아쇠 당기는 것을 손쉽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뉴욕 자유의 여신상

미국에 가려면 72시간 전에 무비자 입국신청(ESTA)를 온라인으로 해야 한다. 교통사고 등 단순 범죄를 제외한 전과자는 무비자신청이 거부된다. 이 경우 비자신청을 따로 해야 한다. 무비자 신청을 하려면 IC 칩이 내장된 전자여권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이후 발급분은 모두 전자여권이지만 그 전에는 일반 여권이므로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렌트카를 빌릴 계획이 있는 경우 면허시험장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추가 발급받는다. 국제운전면허증은 단순한 번역본 정도의 역할이기 때문에 한국 면허증을 반드시 함께 소지해야 유효하다. 미국에서는 원칙적으로 25세 이상만 렌트카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5세 이하에게 빌려주는 경우 훨씬 비싼 추가 요금을 내게 된다.

미국의 관문은 전통적으로 대서양의 뉴욕, 태평양의 샌프란시스코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은 뉴욕 하버의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지나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대기하면서 입국ㆍ세관ㆍ검역수속을 밟았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정부가 선물한 것이다. 태평양 쪽에서는 주로 중국인과 일본 이민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왔는데 1937년 이후에는 길이가 3㎞에 가까운 금문교(Golden Gate Bridge)가 미국 서부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워싱턴 DC에 있는 내셔널 몰(National Mall)은 캐피틀 힐(국회 의사당)에서 워싱턴 기념탑을 지나 링컨 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녹지대를 말한다. 이곳에는 스미소니언 산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제퍼슨 기념관이 서있다. 백악관은 워싱턴 기념탑 가까이 또 하나 축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대법원과 국립도서관도 머잖은 곳에 있다.

미국을 어떻게 나눠 볼 것인가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나로서는 (1) 뉴잉글랜드와 뉴욕과 펜실배니아 등 미드애틀랜틱(Atlantic Seaboard)를 묶은 동부 (2) 워싱턴 DC 이남의 버지니아주에서 텍사스를 아우르는 남부 (3) 오대호를 중심으로 한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위스콘신 주 등과 남북 다코타, 네브라스카, 캔자스까지의 중서부 (4)로키산맥 일대의 몬태나-와이오밍-콜로라도-뉴멕시코부터 태평양 연안의 워싱턴-오리곤-캘리포니아를 잇는 서부 등 네 개 지역으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각 지역에서 가볼만 한 곳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국 가는 길 총론의 마무리는 역시 길로써 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꼭 가보고 싶은 길은 어딜까. 이 역시 다양한 의견과 추천이 있을 수 있지만 네 군데만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뉴욕을 중심으로 북으로 보스턴, 남으로 워싱턴 DC까지 구간. 여기는 사실상 연결이 돼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나의 길다란 메갈로폴리스를 이루고 있다. 이 구간은 자동차와 버스, 기차, 항공편이 모두 가능한데 기차 이용을 추천한다. 기차요금이 좀 비싸지만 바깥 경치가 볼 만하고 도착 후 주차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버스는 메가버스, 볼트버스 등을 온라인 예약하고 타면 값싸게 이용할 수 있고, 차이나타운 버스는 최염가를 자랑한다. 렌트카를 이용할 땐 내륙 쪽의 이면 도로를 이용하면 한적하고 경치가 더 좋다. 셔틀항공편은 미국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둘째,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Highway 1)는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국경까지 3,200㎞인데 이 가운데 샌프란시스코-LA구간은 하루 안(9시간 남짓)에 주파할 수 있다. 1971년 영화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를 본 분들은 영화 첫 장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차로 달리던 해안가 절경의 길을 떠올릴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셋째, 루트 66은 시카고에서 LA를 잇는 3,840㎞의 대륙횡단 신작로다. 일리노이-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아리조나-캘리포니아를 지나간다. 이밖에 하와이제도 마우이섬에 가면 카훌루이 공항에서 하나(Hana)까지 가는 길 약 160㎞ 구간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빙 코스’라고 소개한다. 죽기 전에 꼭 한번 차로 달려봐야 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