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낮 12시. 인도네시아 자카바링 스포츠시티 테니스센터 한국 선수단 관중석. 한숨 소리와 어두움이 가득했다.
직전에 끝난 여자복식 8강전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너끈히 이기는 실력을 갖고 메달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칫 금메달은 고사하고 노메달 종목으로 전락해 대한체육회는 물론이고 테니스인들에게 “현 협회는 뭐하나 잘하는게 하나도 없네”하는 소리가 나올 판이었다.
이기고 지는 것과 관계없이 최선만 다해주면 좋은데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코트에 선 선수들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하면서.
남은 남자 단식 8강전 두경기도 상대 전적에서 뒤지기 때문에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러다 '사사구통(고스톱에서 10자리 5장 5자리 5장 피 10장이 모여야 각 1점씩 나는데 모두 한장 씩 모자랄 때 사사구통 이란 표현을 쓴다)'으로 끝나지 않나하는 우려가 엄습했다.
정말이지 아시안게임 테니스 단장을 괜히 맡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로라하는 테니스인들 놔두고 바쁜 회사일정도 미루고 팔렘방에 휴가가 아닌 한여름 땡볕 바늘방석에서 보냈던 것이 좀 속상했다. 인생 다 그런 것 아니겠냐며 그간 다양한 기업 운영 경험과 세상사 속에서 다 이해하고 넘어가는 듯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허전해 보였다.
친구따라 테니스협회에 관심 갖고 80년대 강남 리츠칼튼 호텔 자리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레슨 받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젊어 명재남 국사 밑에서 배운 합기도는 뒤로 한 채 어느새 테니스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혹시나 협회 도움이 될까 메달 포상금도 내놓고 단장 자리도 맡아 인도네시아 팔렘방에서 꼬박 일주일을 보내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단장인 터라 정장에 자켓까지 입고 정 자세로 한 경기도 빼먹지 않고 관전했다. 가뜩이나 선수들과 평소 일면식이 없고 출정식에 만나 인사한 것이 다 였기에 팔렘방에서도 서먹하기는 당연했다. 밥 한번 같이 먹기 힘든 선수촌과 경기장 주변인지라 더욱더 그랬다.
자칫 한경기라도 안보고 빼먹으면 해당 선수들이 서운해 할까봐 꼬박 지켜봤다. 단장이라 체육회 인사들이 점심하자며 만나자고 하는 것은 다 뿌리쳤다.
그러면서 쉽게 이기는 경우, 어렵게 이기는 경우, 기대한 선수들이 지는 경우 등등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다른 나라 선수들도 눈여겨 보았다.
합기도라는 운동을 하고 무술대회에서 나가 본 터라 운동의 세계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테니스는 또 다른 것 같다.
결국 점심을 컵라면으로 해결하고 권순우와 이덕희의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8강전을 지켜봤다. 혹시나 자세나 복장을 편하게 하면 경기하는 선수에게 누가 될까봐 정 자세와 정장차림으로 꼬박 지켜봤다.
23일 권순우와 인도 구네스와란의 8강전 1세트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상대 선수의 포핸드와 서브에 밀리는 듯했다. 권순우는 꾀를 내어 상대가 베이스라인 뒤에 있을 때 네트 앞에 떨어지는 드롭샷으로 재미를 봤다. 1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이기자 안도의 한숨을 쉬고 1번 코트에서 시작된 이덕희의 경기를 응원하려고 자리를 옮겼다. 일단 권순우가 1세트를 이겼으니 남은 응원은 일부 선수와 코치들에게 맡겼다. 이기겠지하는 작은 마음을 센터코트 자리에 놔 둔 채.
1번코트에 가니 이덕희와 대만의 제이슨 정 경기가 시작됐다. 제이슨 정은 다부졌다. 이마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오게 생겼다.
그런데 이덕희가 제이슨의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앞서 나갔다. 1세트 5대2가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덕희가 수비로 돌아서자 제이슨 정이 따라 붙었다. 자칫 그동안 번 것 다 내주게 생겼다. 등을 의자에 기대지도 못하고 몸을 앞으로 하고 보게 되었다. 더운 날씨 탓도 있지만 온 몸에 열이 올랐다. 얼굴은 화끈 거리고 긴 머리는 차 댈 데 하나도 없는 시내 한복판에 차 갖고 나온 격으로 거추장스러웠다.
1세트 6대3으로 이덕희가 이겼다. 이 분위기 그대로 가면 메달은 떼 논 당상이다. 근데 2세트 초반 들어 이덕희가 약간 밀리는 듯 하다가 4대2로 달아났다. 테니스는 라켓 내려놓기 전까지 결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겼으면 했다. 아니나 다를까 5대2에서 제이슨 정이 뒷심을 발휘했다. 볼은 자꾸 이덕희 쪽으로 넘어오고 이덕희는 연신 퍼냈다. 5대5로 가고 2세트를 내줄 판이었다. 제이슨의 예의바른 태도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덕희를 좌우 극단으로 몰아쳤다. 이덕희 가슴의 태극마크는 푸른 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더욱 선명해졌다.
제이슨 정은 좌우로 길게 쏴대다가 짧게 네트앞에 떨어뜨려 이덕희를 괴롭혔고 착실하게 득점으로 연결했다. 아. 다 이긴 경기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이덕희는 혼신을 다해 백핸드쪽으로 볼이 오면 볼 터져라하고 더 강하게 리턴했다. 매치 포인트가 되고 이덕희의 승리로 끝나자 눈에서 더운 물이 울컥 쏟아졌다. 갖고 있는 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세상에 이런 경우도 다 있나.
심판의 아웃 판정 소리가 안들려 상대보다 한번 더 치는 선수 이덕희. 상대가 안치면 그제서야 라켓 날개짓을 멈추는 선수. 언제 봤다고 위닝 샷 나올 때마다 주먹쥐고 나와 아이 콘택을 하는 선수. 지난 일주일 그리고 이전에 단장 맡아 하겠다는 일, 평소 경험 해보지 못한 누추하고 험블한 호텔 생활. 중국 맛인지 인도네시아 맛인지 국적 분간이 어려운 음식들. 가방에 왕뚜껑 컵라면 넣어다닌 생각. 어떻게 하면 선수단을 편하게 할까하는 생각 등등.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대표팀과의 일주일이 큰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누구도 해보기 어려운 경험.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오전 9시반에는 어김없이 경기장 출근. 퇴근은 밤 9시가 넘도록 늦어지고 점심은 도시락.
이덕희의 그 메달을 보려고 그토록 많은 것들이 싸이고 싸인 것 같았다.
내심 권순우의 4강 진입도 기대했다. 3세트 4대 4, 5대 5, 6대 6. 오마이 갓. ‘주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4대 4에서 권순우가 자신의 게임 지키고 상대 게임 브레이크해 끝내면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3세트 타이브레이크 2대 6이 되자, 이렇게 끝나면 정말 억울한 생각에 한 포인트마다 박수와 함성을 질렀다. “권순우 파이팅”. “권순우 파이팅.” 그 때문인지 권순우는 처절한 목소리를 내며 타이브레이크 2대 6에서 딱 한점 남기고 뒤지다 6대6까지 따라갔다. 비가 내렸다. 40분뒤 재개된 경기에서 7대6으로 오히려 매치 포인트를 권순우가 먼저 잡았다. 그것이 다였다.
절대자는 인간의 바램과는 달리 절대자의 세상 돌아가게 하는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테니스 선수단 최덕현 단장을 대회기간동안 지켜보면서 1인칭 화법을 섞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