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밤,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열리고 있는 씨티 오픈 2회전. 호주의 닉 키르기오스 (22세, 세계 20위)와 미국의 태니스 샌더그랜 (26세, 106위)의 경기는 6-3, 3-0 으로 지고 있던 키르기오스의 기권으로 싱겁게 끝이났다. 이유는 오른쪽 어깨 통증.
관중석의 그의 엄마는 사춘기 아들을 설득하는 듯 걱정과 불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좀 더 해봐야지.’
‘더이상 플레이하고 싶지 않다니까요!’
코트 체인지 때 카메라에 잡힌 모자의 입모양 대화는 짧게 끝이났다. 짐을 챙겨 경기장을 떠나는 키리기오스를 향해 관중들로부터는 야유가 쏟아졌다. 무려 3번이나 연속된 기권패였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영국 런던 퀸즈 클럽에서 열렸던 이곤 챔피언십 1회전에서는 미국의 도널드 영과의 1세트 경기 도중 미끄러진게 원인이었다. 결국 6-7로 패한 후 엉덩이 통증으로 경기장을 떠났었다. 이어 출전한 7월 윔블던 오프닝 경기에서는 프랑스의 에르베르를 상대로 3-6, 4-6 으로 두세트를 뒤지다가 역시 엉덩이 통증을 이유로 기권을 선언한 바 있다.
닉 키르기오스는 어쩌면 만성적인 엉덩이 통증에 시달리고 있고 새로이 어깨 부상까지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밝힌대로라면 다가오는 US오픈을 대비해 몸상태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전략적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이어진 코트 안과 밖에서의 그의 행동들로 이미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태라 그의 이번 씨티 오픈에서의 기권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유난히 싸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는 ‘야생물 (Wild Thing)’이라는 별명처럼 ATP가 정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코트 내 규정을 위반하고 벌금형을 받은 경력이 있다. 체어엄파이어, 볼퍼슨, 카메라맨, 관중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상대 선수의 여자친구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공격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라켓 내려쳐서 부수기나 테니스 볼 발로 차버리기에도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해야 하는 규정에는 무성의한 서브와 무기력한 경기태도를 보여 벌금에 더해 출전정지, 심리상담 권고까지 받은 바 있다.
코트 밖에서 그를 유혹하는 것은 다름 아닌 농구다. 14살까지 호주 주니어 농구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그는 2015년 Independent 지와의 인터뷰에서 테니스와 농구에 대한 그의 속내를 밝혔다.
“나는 테니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시작했을 뿐이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스포츠는 언제나 변함없이 농구이다. 테니스 투어를 다닐 때에는 농구경기 보는 것을 피해야만 테니스 경기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난해 상하이 롤렉스 마스터즈에서 $25,000 벌금과 8개월 정지처분을 받은 직후 키르기오스는 돌연 올 2월에 참가하기로 했던 네덜란드 로테르담 오픈 불참을 선언했었다. 자숙이나 재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시기에 열리는 NBA 올스타 셀레브리티 농구경기에 참석하고 싶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테니스 매치는 물론 농구대회도 모두 불발로 끝나버렸다.
올해 윔블던 대회에서 기권패한 이후에는 곧 이어 아틀란타 오픈에도 부상으로 불참을 결정했는데, 대회의 작년 우승자인 그가 디펜딩 챔피언의 기회를 포기할 만큼 상태가 심각한가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가 캔버라의 지역단위 농구대회에서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며 득점을 뽑아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테니스를 향한 행보에 심각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언론과 대중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닉 키르기오스에게 그 어느때 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다. 탄탄한 기본기에 절묘한 트위너와 드롭샷, 농구선수다운 점핑 스트로크 등의 화려한 개인기까지 겸비한 그가 세계 정상의 선수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코트를 누비는 모습을 아직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닉 키르기오스는 1995년 호주에서 그리스 아버지와 말레이지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013년 호주 오픈 주니어 우승을 따내며 주니어 세계 1위에 등극했고, 프로무대에 데뷔한 다음 해인 2014년 19살 나이로 호주 오픈 2회전, 윔블던에서는 당시 세계 1위 나달을 16강에서 물리치고 8강, US 오픈 3회전 진출이라는 눈분신 활약을 보이며 테니스 신동에서 호주의 차세대 테니스 스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 했었다.
2015년 마드리드 오픈 2회전에서는 로저 페더러를 3세트 모두 타이브레이커로 가는 접전 끝에 물리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