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윔블던 대회가 6월28일부터 7월10일까지 열린다. 선수와 팬들에게 윔블던은 꿈의 무대이자 테니스의 본산이지만, 스포츠 마케팅에 나선 기업에겐 오르기 힘든 장벽과도 같다. 윔블던은 경기장 안팎에 상업광고를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이다. 코트 내부는 물론 펜스, 관중석 어디에도 광고물이 허용되지 않는다.

녹색 잔디코트 위 흰 유니폼 향연. 윔블던의 이 클래식한 품격엔 상업성에 오염되지 경기장 환경이 한몫 해왔다. 윔블던은 스폰서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른 그랜드슬램 대회 못지 않은 후원 수익을 올리고 있다. 중계료와 품목별 공급자(official supplier) 지정을 통해 기본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영리를 취한다.

공급자 품목은 자동차, IT기술부터 맥주, 커피까지 12개에 이른다. IBM, HSBC, 에비앙, 랄프 로렌 등 이른바 블루칩 브랜드가 즐비하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공급자가 바로 슬래진저(Slagenzer)다. 더구나 그 품목이 테니스 경기의 핵심을 이루는 공이다.

슬래진저는 1902년부터, 그러니까 무려 114년째 윔블던 잔디코트에서 사용되는 공인구를 독점 공급해왔다. 다시 말해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존 매켄로, 피트 샘프라스, 로저 페더러 등 전설적인 스타들이 모두 슬래진저 공을 두드려 윔블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올해 대회에서도 무게, 경도, 반발력 등 엄격한 검사를 거친 슬래진저 공 5만2000개가 공급되었다.

▲ 슬레진저 창업자 랄프 슬레진저

테니스 마니아에겐 잘 알려져 있지만, 슬래진저가 1세기 넘게 윔블던 공인구였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도 많을 것이다. 슬래진저 브랜드가 국내에선 워낙 중저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다. 실제로 슬래진저 하면 할인점에서 파는 운동화?양말을 떠올리곤 한다. 흑표범이 그려진 로고 또한 퓨마를 모델로 삼은 독일 스포츠 브랜드 퓨마의 짝퉁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이는 슬래진저가 2000년대 들어 해외 브랜드 라이센싱 관리를 손 놓아 아무나 상표등록만 하면 브랜드를 쓸 수 있게 된 데 기인한다. 한국에서도 삼성물산이 독점적 라이센싱 사업자로 생산, 총판을 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했다. 이후 중소 사업자가 저가형 제품에 사용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추락했다.

국내에선 중저가 이미지

슬래진저 본가가 걸어온 길은 이와 영 다르다. 슬래진저는 유대계 영국인 형제 랄프와 알버트 슬래진저가 1881년 런던에서 연 스포츠용품점이 그 효시다. 이들은 고무가공 기술을 확보해 테니스, 골프, 크로켓 공과 라켓을 개발했다. 이들 세 종목은 오늘날까지 슬래진저의 3대 주력 제품라인을 이루고 있다.

창업 7년 만에 전 영국 크로켓 대회 공인구로 채택되는 성과를 올렸다. 슬래진저란 브랜드를 사용한 것은 이때부터다. 1902년 윔블던 대회 운영자인 올 잉글랜드 클럽(All England Club)으로부터 공인구(Official Ball to The Championships, Wimbledon) 공급자로 선정돼 지금껏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스포츠용품 메이커로 승승장구한 슬래진저는 1920년대 일찌감치 해외로 진출했다. 1922년 호주, 1924년 캐나다 등 영연방국가를 중심으로 공장을 세웠다.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는 대기업이 라이센싱 사업을 맡아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 고급 스포츠 브랜드 이미지를 살려나갔다.

영국은 물론 호주, 뉴질랜드에선 지금도 슬래진저가 아디다스, 리복에 뒤지지 않는 브랜드로 통용된다. 한국과 크게 대조되는 양상이다. 같은 브랜드가 이처럼 시장에 따라 큰 위상 차이를 보이는 사례는 브랜드 마케팅 전략의 좋은 연구자료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 슬레진저 라켓을 사용한 프레드 페리(오른쪽)

슬래진저 브랜드의 전성기는 1920~30년대였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 테니스 스타 프레드 페리는 1930년대 슬래진저 라켓으로 윔블던 우승을 세 차례나 차지했다. 이후에도 슬래진저가 후원하는 많은 스타들이 그랜드슬램 무대를 누볐다.

슬래진저는 2차 대전 때인 1939~1945년 군용물자 제조사로 전환해 많은 양의 군수품을 댔다. 장갑, 군복 등 피복류와 총기 부품 등을 영국군과 미군에 공급했다. 전후 본업으로 돌아온 슬래진저는 인수합병 회오리 속에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 1959년 영국 태생의 던롭 러버(Dunlop Rubber)에 매각됐고, 모기업이 투자회사 등에 인수됐다.

그 과정에서 한때 ‘던롭 슬래진저’란 합병 브랜드가 사용되기도 했으나, 독자적 가치를 인정받아 각자 고유영역을 지닌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수많은 스포츠 브랜드의 부침 속에 1세기 이상 버틴 전설적 장수 브랜드의 내공을 입증한 셈이다. 슬래진저는 테니스, 크로켓 공과 라켓에 관한 한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아성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