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는 올해 나이 일흔여덟 살의 현역 학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서 유럽과 미국, 한국에서 일생동안 한국학을 공부했다. 매사에 꼼꼼하고 깐깐한 독일계 할머니답게 그는 사료를 일일이 확인해 조선시대 유교의 도입에 따른 가족제도의 변화를 조목조목 짚어냈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런던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를 지낸 도이힐러 교수가 지난 1992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했던 저서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의 개정판을 최근 ‘한국 사회의 유교화 과정’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펴냈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부계 중시와 장자 상속, 종손계승 등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17세기였다. 15세기 초 정도전, 조준 등 조선의 건국세력이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 조선 사회를 부계 사회로 일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지 2백년 만이었다. 그 이전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양계 사회’였다는 것이 도히힐러 교수의 견해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고려시대까지는 거의 비슷한 사회발전의 길을 걷다가 13세기 전반 몽골의 침공을 계기로 해서 역사의 길이 확연히 갈라졌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몽골의 지배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작용으로 문치 위주의 ‘신유교(Neo-Confucianism)’를 지배이념으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된 반면 몽골의 침입을 가미가제의 도움으로 물리친 일본은 무사계급이 대두하면서 ‘센코쿠(전국)시대’를 거쳐 무단통치의 봉건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고유 풍습이 많이 남아있어서 남녀교제 등 성 풍속이 비교적 자유로웠고 여성의 지위도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일부종사와 개가금지, 적서구분과 남녀차별 등 남성 중심의 부가장제도가 도입됐고 서서히 뿌리를 내려갔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중국 고대의 이상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자는 것이었던 유교정치가들의 꿈에는 기실 소수 지배계급 중심의 정치적 안정과 함께 정치경제적 권력을 온전히 대물림하자는 속내가 깔려있었다는 것이 도이힐러 교수의 지적이다.
여기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은 큰 변함이 없었다는 시각이 전제돼 있다. 왕조가 갈리고 제도가 바뀌어도 지역과 씨족에 기반을 둔 권문세가, 즉 세족(世族)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고 특권을 누린 데는 근본적 변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사회가 상대적으로 언로가 넓었고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인식은 다분히 현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궤를 같이한다.
21세기가 여성의 시대가 되리라는 전망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1970년대부터 줄기차게 나왔다. 2000년대 들어서 우리 사회가 부가장제도에서 벗어나 모계사회로 탈바꿈해가고 있다는 지적은 이제 진부할 지경이 됐다. 그러나 도이힐러 교수는 이런 움직임이 한국사회가 조선 후기의 부계사회에서 고려시대 이전의 ‘양계(兩系)사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징표라고 말하고 있다. 당장 모계사회가 온다기보다 한국 여성들이 고려 이전 시대의 위상을 되찾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를 보면 집안마다 장자 위주의 상속과 ‘유산 독차지’를 두고 형제자매 간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알력과 불화가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들의 부모가 부계사회와 장자상속이라는 기존 관념에 매달린 마지막 세대였다는 것이 형제간 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딸들에게는 재산을 나눠주지 않거나 조금만 주고, 아들 가운데도 맏이에게 제사와 봉양의 책임과 함께 유산을 대부분 물려준다는 생각이 확고한 가부장이 지금 70대 이상 세대에는 흔했다. 반면 장자가 아닌 자녀들은 변화하는 법과,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균분상속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지난 20~30년 동안 상속법 개정이나 호주제 폐지 등 가족제도를 규율하는 민법 개정이 지나칠 정도로 손쉽게 이뤄진 데 반해 급격한 변화에 따른 분쟁과 갈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실질적 노력은 미처 뒤따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여성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입법활동은 더욱 가속돼야 마땅하다. 단지 어떤 사회변화든지 이에 따른 피해자에 대해서도 배려가 있어야 하고 잠재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예방하는 얼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