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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35달러 주고 만든 ‘세기적’ 로고 ,나이키[브랜드스토리] 무명의 운동화에서 세계 1위 스포츠 브랜드로
오룡(코멘터리 편집주간]  |  roh@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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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0  06: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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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오픈에서 상대 공격을 막은 뒤 발을 벌려 나이키 신발로 버티는 정현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 올림픽 같은 국제 스포츠대회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브랜드는? 두말 할 것 없이 ‘나이키(Nike)’다. 일류 선수일수록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제품을 사용하곤 한다. 그만큼 품질과 이미지가 탁월하다는 뜻이다. 부메랑 모양의 날렵한 로고를 앞세운 나이키의 브랜드 파워는 업종을 통틀어 세계 최상위권으로 꼽힌다.

나이키 브랜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 아디다스가 아성을 구축하고 있던 스포츠용품•의류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나이키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나이키 신화’를 살펴보려면 1964년 미국 서부 오리건 주 포틀랜드 근교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오리건 대학 육상부 코치였던 빌 보워만(Bill Bowerman, 1911~1999)은 선수들이 좀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는 운동화 개발에 골몰했다. 그는 신발제조업체들에게 제작을 의뢰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자신이 직접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운명의 조우가 이뤄진다. 오리건 대학 육상선수를 지낸 필 나이트(Phil Knight, 1938~ )는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서 일본 운동화 수입 유통에 관한 논문을 썼다. 자신의 이론을 실행에 옮겨 일제 운동화 수입을 시도했다. 그는 아식스 전신인 오니츠카 타이거 회사를 접촉해 미국 내 독점 판매권을 따냈다. 샘플 운동화가 도착하자 보워만에게 보내 상의했다. 보워만은 곧바로 나이트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안한 운동화 디자인을 일본에 보내 제작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1964년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웠다. 각자 500달러씩 낸 자본금으로 일본제 운동화 300켤레를 수입해 팔기 시작했다. 매장도 없이 차에 싣고 다니며 첫 해 1300켤레를 팔아 8000달러 매출을 올렸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했던 일제 운동화는 폭발적인 판매 신장세를 보였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 첫 매장을 냈고 이듬해 동부지역까지 진출했다.

보워만은 일본제보다 더 가볍고 탄력 좋은 운동화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수입제품에 뒤축 폼 쿠션 디자인 등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그 결과 블루 리본 스포츠는 오니츠카와의 계약 만료를 앞둔1971년 자체 생산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세계시장을 휩쓴 나이키 브랜드와 로고는 이때 만들어졌다. 나이키는 그리스신화 승리의 여신 이름에서 따왔다.

일본제 운동화 수입상으로 출발

새로운 로고가 필요했던 두 사람은 포틀랜드 주립대 여학생 캐롤린 데이비드슨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이들은 역동적인 움직임이 담긴 디자인을 요구했다. 용역 대가로 시간당 2달러를 주기로 했다. 며칠 후 데이비드슨은 총 35달러 청구서와 함께 로고 시안 여러 개를 들고 왔다. 두 사람은 한 눈에 맘에 드는 디자인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화와 상자에 인쇄할 로고가 당장 필요했다.

나이트는 보워만에게 “별로 맘에 안 들지는 않지만 갈수록 점점 좋아질 것 같다”며 부메랑 로고를 골라 들었다. 오늘날 수십억 달러 가치로 환산되는,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나이키 로고는 이렇게 탄생했다. ‘스우시(Swoosh)’라 불리는 이 부메랑 디자인은 필기체 또는 활자체 ‘Nike’와 함께 쓰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랜드네임을 떼어내고 단순한 문양 자체만 사용되고 있다. 데이비드슨은 이후에도 나이키 회사의 각종 디자인을 맡았고, 스탁 옵션을 받아 한 재산을 챙겼다.

독보적인 품질과 브랜드가 결합되면서 나이키 명성은 수직 상승했다. 보워만은 와플 제조기에 액체고무를 부어 스파이크를 만드는 실험을 계속한 끝에 정지마찰력이 뛰어난 밑창을 개발했다. 이 러닝화는 가벼우면서 뛰어난 경기력을 발휘했다. 1970년대 미국 육상 신기록 보유자였던 스티브 프리폰테인이 처음 신은 이후 나이키 운동화는 육상선수들에게 대세가 됐다.

1978년에는 테니스 스타 존 매켄로가 나이키 제품사용 계약을 맺었다. 매켄로의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공격적 성향은 나이키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졌다. 나이키는 1980년대 들어 미국 스포츠화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했다. 이 무렵 미 항공우주국(NASA) 직원의 권유로 단단한 주머니에 압축공기를 주입해 압력을 가한 에어 쿠셔닝 밑창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1980년대 후반 제품화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나이키는 출범 10여 년 만에 스포츠 브랜드의 절대강자였던 아디다스를 누르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당시 거세게 일어난 조깅 등 레저 스포츠 붐이 나이키의 도약에 한 몫 했다. 1980년대 이후 영국의 리복이 거센 도전을 했으나 나이키는 ‘스타플레이어 마케팅’을 앞세워 우위를 지켜나갔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을 앞세운 ‘에어 조던’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다. 이어 골프의 타이거 우즈, 테니스의 마리아 샤라포바, 미식축구의 제리 라이스가 잇따라 나이키 마케팅에 합류했다.

나이키는 1980년대 후반 ‘저스트 두 잇(Just Do It)’ 광고 캠페인으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메시지는 스포츠 자체를 표현하는 동시에 용기 있는 실천을 북돋고 개인의 권리와 용기를 일깨우는 역할까지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키는 2012년 매출 241억 달러로 스포츠용품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에는 1986년 현지법인이 설립돼 운동화, 의류, 가방 등 각종 스포츠용품을 판매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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