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오픈에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출전한 한국선수가 또 졌다. 그러나 절대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았다.

한나래(인천시청, 274위)는 지난 20일 열린 코리아오픈 2회전에서 사라 소리베스 토르모(스페인, 93위)에게 1시간 13분 만에 1-6, 2-6으로 져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지난 19일 1회전에서 세계 42위 크리스티나 플리스코바(체크)를 2-0으로 완파하고 대회 사상 5번째로 한국선수의 본선 2회전 진출을 해냈지만, 지난 2013년 장수정(사랑모아병원, 145위)에 이은 두 번째 한국선수 8강 진출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한나래는 왜 졌을까. 과연 최선을 다한 걸까. 평일 낮 시간에 직접 코트에 찾아와 응원해준 관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줬지만, 한나래는 분명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1. 한나래는 당황했다

평소 한나래는 시속 100㎞가 넘지 않는 슬라이스 서브로 상대의 리턴 리듬을 무너뜨린다. 왼손잡이기 때문에 애드코트에서 서브를 넣게 되면 오른손잡이 상대의 백핸드쪽으로 한참 휘어져 나간다. 그는 일명 ‘비행접시 서브’ 라 불리는 이 기술로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이날 맞붙은 소리베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소리베스는 한나래의 느린 서브를 모두 슬라이스로 리턴했다. 이에 대해 소리베스는 “한나래의 1회전 경기를 보고 슬라이스로 대응하기로 했다. 사실 이렇게 내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 설명했다. 이 슬라이스 리턴은 한나래의 무릎 높이로 살포시 날아갔다. 한나래는 여기서 당황했다.

한나래는 “이런 선수는 1년에 많아야 2~3번 만난다. 한국선수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맞대응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오늘 경기 내내 상대의 예상 밖 플레이에 해법을 찾지 못해 답답했다” 고 말했다. 평소에 이런 선수에 대비한 연습을 안했느냐고 묻자, 한나래는 “히팅파트너가 그런 스타일로 연습을 도와줘야 하는데, 우리 팀에는 히팅파트너가 없다. 인천시청 동료들과 연습을 할 때는 그저 서로의 스트로크를 점검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고 답했다.

평소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상대 선수를 분석한다는 한나래는 “유튜브에서 소리베스의 경기를 보고 나서, 회전이 많은 볼에 대비해 반 박자 빠른 리턴으로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니 상대의 구질은 공략하기 어려웠고, 영상에서 보지 못했던 슬라이스와 발리까지 자주 시도해 당황했다” 고 말했다.

2. 한나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답답한 와중에도 한나래는 계속 공격을 시도했다. 베이스라인 뒤에서 탄탄한 수비로 맞선 상대에게 선제공격을 퍼부어야 승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의 리턴은 한나래가 좀처럼 한 발 앞으로 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대가 종종 네트 앞으로 돌진해 왔을 때 패싱샷으로 허를 찌르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어설픈 로브로 대처했다가 스매쉬 위너를 얻어맞았다.

한나래는 “보는 사람들도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패싱샷을 날리기란 쉽지 않았다. 상대가 네트로 다가오니, 코트가 꽉 차보여 볼을 어디로 쳐야할지 몰랐다. 평소에 로브 시도를 잘 하는데 오늘은 그것마저 안 들어갔다. 나에게 스매쉬 기회가 왔을 때도 자신이 없어서 강하게 꽂아 넣지 못했다” 고 설명했다.

2세트 0-2로 뒤지던 한나래는 상대 서브게임에서 네 차례나 브레이크 포인트를 잡은 끝에 이날 경기 첫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무려 16포인트를 주고받으며 따낸 게임이었다. 한나래는 “이 때 상대의 서브가 강하지 않다는 점을 노려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고 말했다.

2세트 후반 1-5까지 끌려갔지만, 한나래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위너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나래는 “경기 흐름을 바꾸기 위해 슬라이스, 쇼트, 발리까지 시도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 있게 포핸드로 때리자고 마음먹었던 게 주효했다” 고 설명했다.

3. 한나래도 상대 선수를 힘들게 한다

이날 경기 스코어만 놓고 보면 소리베스가 쉽게 이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리베스는 결코 손쉬운 승리를 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한나래의 슬라이스 서브에 고전했느냐는 질문에 소리베스는 한껏 질린 표정을 지으며 “매우 힘들었다. 한나래가 왼손잡이기 때문에 리턴하기가 더 어려웠다. 평소같이 백핸드 스트로크로 리턴할 수가 없었다” 라고 답했다. 분명 승자의 여유가 담긴 ‘립서비스’ 는 아니었다.

사실 팬들 사이에서는 한나래의 서브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간다. “쟤는 서브가 너무 약해”, “저거 완전 동호인 서브네” 라는 등의 혹평이 많은 편이다. 이날 경기 중에도 “서브가 안 되네” 라며 탄식을 쏟아내는 관중들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한나래에게는 서브를 더 강하게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상대 선수는 느린 서브 때문에 힘들어 했다.

한나래는 지난 19일 1회전 승리 뒤 “내 약점을 보완하는 것보다는 강점을 살리는 데 집중하고 싶다” 고 밝힌 바 있다. 한나래에게 느린 서브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그 강점으로 상대를 충분히 괴롭힐 수 있다.

한나래의 탈락으로 이번 대회 단식 대진표에서는 한국선수의 이름이 모두 사라졌다. 코리아오픈에서 한국선수가 단식 우승을 차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장수정과 한나래는 분명 국내 1, 2인자로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출전해 열심히 싸웠다. 아직은 패배한 기억이 더 많지만, 절대 맥없이 물러난 적은 없었다. 이날 한나래는 올림픽공원 센터코트에서 1시간 13분 동안 치열하게 이것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