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동부

▲ 월든

1980년대 초 보스턴 지역에 처음 갔을 때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교외에 있는 월든(Waldon Pond)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호수로 직행했다. 고등학교 시절 <월든; 또는, 숲 속의 생활>이라는 책을 읽은 뒤로 내 마음 속의 고향 같았던 그곳을 찾아서였다. 월든을 소개한 것은 내게 정신적 우상이자 멘토 격인 형 친구였다. 젊음의 질풍노도와는 거리가 멀게 담담하고 평이한 내용이었지만 결국은 내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어버린 한 권의 책이 되고 말았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가소성(可塑性)이 큰 나이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소박한 삶과 드높은 생각’을 기리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1817~62)는 미국의 형이상학적 초월주의 철학자 에머슨의 젊은 친우이자 추종자로 시작했다. 에머슨이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의 고답적 사조를 받아들여 개인의 존엄과 자립정신, 자연의 존중을 강조했다면 소로우는 환경론의 원조이자 ‘시민의 불복종’과 비폭력사상을 통해 톨스토이와 간디, 마틴 루터 킹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받고 있다. 보스턴 교외 콩코드에 살았던 소로우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3㎞ 떨어진 월든 호수로 가서 오두막을 짓고 2년 두 달하고도 이틀 동안 혼자 살았다. 월든 책에는 최소한의 돈으로 살아간 지출명세서가 꼼꼼히 기록돼 있고 이스트(효모) 없이 빵을 굽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다 성공한 얘기가 자세히 적혀 있다.

큰맘 먹고 가 본 월든 호수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주변의 난개발로 웬만한 미국 주택가만도 못해 보였다. 한 무제 때 동방삭과 공손홍이 세상을 피해 숨을 곳을 논하다가 산중이나 ‘오랑캐 땅’보다 저잣거리가 더 좋고 궁중에 숨는 것이 으뜸이라 한 데서 시은(市隱)이란 말이 나왔다. 소로우가 경치 좋은 외진 곳, 깊은 숲이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평범한 호수에 은거한 것을 보면 미인이나 절경도 한 주일만 지나면 시들하다는 이치를 잘 알았나 보다. 그의 고독한 자립생활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실험이었다면 100년 뒤 심리학자 B. F. 스키너가 쓴 소설 <월든 2>는 행태공학으로 유토피아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사회실험이었다. 그러나 내겐 ‘하나님 놀이’를 하려는 인간의 오만과 탈선을 풍자하는 것으로 읽혀졌다.

▲ 미국 대학 아이비리그

에머슨과 소로우, 스키너는 모두 하버드대학 출신이다. 미국의 지식인사회를 주도해 온 하버드를 비롯한 동북부의 8개 사립 명문대를 ‘아이비리그’라 한다. 이 가운데 하버드와 프린스턴, 예일을 ‘빅 3’라고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바와 달리 하버드보다 프린스턴을 높게 쳐주는 미국인도 많다. 법대가 예일, 의대가 하버드라면 프린스턴은 백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학부가 강세를 보인다, 실제 뉴저지주 프린스턴은 대학에 적을 둔 지식인들과 함께 직업이 따로 없는 채 주식투자로 소일하는 부호들이 적잖은 소도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2년 만에 조지 워싱턴대에서 학사를 받고 1년 뒤 하버드에서 석사, 다시 2년 만에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아이비리그 문과 계열에 관한 한 하나의 기록이라 할 만 하다.

20여 년 전 어느 국립대 교수로 있던 친구가 대학도서관 신축을 앞두고 아이비리그를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길안내를 해주고 구경도 할 겸 열흘 동안 8개 대학 캠퍼스를 순방한 적이 있었다. 뉴욕 시내의 콜럼비아를 시작으로 예일, 브라운, 하버드, 코넬, 다트머스, 프린스턴, 펜실베니아(유펜) 순으로 다녔는데 마침 다트머스대를 방문하는 길에 저녁 해가 지는 바람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7개 대학도 각자 오랜 전통과 특색을 뽐내는데 캠퍼스의 자연 환경으로 치자면 다섯 손가락처럼 생겼다는 핑거 레이크스를 끼고 있는 코넬이 으뜸으로 꼽힌다. 건축미로는 예일대학 건물들이 노란색 사암으로 통일돼 있어 균제미가 두드러지는 반면 프린스턴은 각 시대의 건축양식을 다 모은 것처럼 건물이 제각각이라서 나름 다양성의 조화가 있다. 하버드는 붉은 벽돌 건물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고 브라운의 캠퍼스도 큰 감명이 없다. 유펜의 경우 시내 한 가운데 대학 건물들이 흩어져 있는 편이라 유럽의 낡은 대학 같이 궁상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딜 가나 대학의 심장이라 할 중앙도서관의 분위기만은 한결 같이 진지하고 학구적이다. 미국에서는 중고생이 공부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은 거의 없지만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은 밥 먹듯 철야를 한다.

미국 동북부는 뉴잉글랜드지방과 대서양 연안지방, 그리고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을 아우른다. 뉴잉글랜드는 최북단 메인으로부터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까지 6개 주를 말하는데 미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지방이다. 도로, 건물, 시설 등 건조물과 산과 강, 숲 등 자연의 스케일이 영국과 비슷하게 오밀조밀한 편이다. 미국은 보통 남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모든 것의 규모가 커지는데 최고봉은 역시 텍사스여서 음식물도 ‘특대’ 사이즈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성향이 내륙으로 갈수록 보수성이 강한 것은 뉴잉글랜드도 마찬가지다. 다만 노예제에 대한 이견이 남북전쟁의 빌미가 됐던 것처럼 뉴잉글랜드의 공화당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온건하고 중도 내지 진보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소수파로서 종교적 핍박을 피해 신세계로 왔다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뉴잉글랜드가 농업보다는 통상무역 및 제조업이 발달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한번은 차를 몰고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를 지나는데 농작물 재배를 볼 수 없어서 소도시 상공회의소를 들러 주민들이 뭘 먹고 사냐고 캐물어 본 일이 있다. 그랬더니 회원 명부를 보여주면서 거의 자영업과 공공부문 등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고 농부는 거의 없다는 대답이었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은 제1의 물결인 농업이 지배하던 남부와 제2의 물결 공업화가 이뤄진 북부의 대결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1970년대 이후 에어컨의 보급과 함께 공장들이 남부로 떠나갔고, 제3의 물결인 IT와 환경산업은 서부 태평양 연안이 주도하고 있어 동북부는 지식산업과 법률·금융·보험 등 전문서비스업을 집중 공략하고 있는 실정이다. 뉴잉글랜드에서는 보스턴이 중심 도시다. 미국 최초의 공립학교, 대학, 신문사, 노조, 지하철은 모두 보스턴에서 생겼다. 보스턴 한 가운데 7,000평쯤 되는 미국 최초의 공원 보스턴 커먼스로부터 벙커힐 모뉴먼트까지를 잇는 ‘프리덤 트레일(4㎞ 90분)’을 따라 걷는 워킹 투어도 필수 체험. 역사적 건물에 자리 잡은 보스턴의 전통시장 퀸시 마켓이 최고라는 사람도 만났다. 보스턴 근교에서는 렉싱턴과 세일럼, 플리머스 등 소도시를 가보면 좋다. 좀 더 나가면 마사즈 빈야드라는 섬과 케이프 코드 끄트머리의 프로빈스타운이 놓칠 수 없는 곳. 프로빈스타운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필그림 파더즈가 상륙한 곳이고 극작가 유진 오닐이 이끌었던 극장이 지금도 활발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는 농구의 발상지고 그 북쪽의 앰허스트에는 미국의 최고의 리버럴 칼리지(학부만 있는 소규모 문과대학)라는 앰허스트대학과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일생을 보낸 집이 있다. 로드아일랜드 뉴포트 해변에서 가까운 안길에 테니스 명예의 전당이 방문객을 반긴다. 뉴포트는 19세기 뉴욕의 부호들이 여름 별장을 짓는 곳이었고, 지금도 바닷가를 따라 대저택들이 즐비하다. 코네티컷에서는 예일대가 있는 뉴헤이븐 외에도 19세기 포경선의 모항이었던 미스틱 항과 하트포드의 마크 트웨인 기념관을 들를 만하다. 버몬트주는 뉴요커들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귀농·귀촌할 때 최고 인기의 행선지다. 버몬트주 베닝턴 박물관은 78살에 처음 그림을 그려서 101세까지 붓을 들었던 민속화가 그랜마 모세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뉴햄프셔는 미국 대통령선거가 열리기 전 가장 먼저 프라이머리(정당 예선)가 열리는 주로 유명하고 ‘자유롭게 살아라. 아니면 차라리 죽으리라’는 모토로 더 유명하다. 하노버에는 다트머스 칼리지가 있고, 마운트 워싱턴은 동북부 최고봉인데 최고 22% 평균 12%의 가파른 경사도로 악명 높은 전장 12.2㎞의 자동차도로가 있다. 꼭대기는 시속 372㎞의 강풍이 관측된 적이 있어 북반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메인는 뉴잉글랜드의 다른 5개 주를 다 합친 것보다 넓고, 경치가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보스턴에서 차를 타고 바다를 따라 올라가면 뉴햄프셔를 지나 메인에 들어서자마자 키터리라는 아웃렛 몰 마을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부시 일가의 별장이 있는 케네벙크포트이고 쭉 더 가면 포틀랜드라는 항구도시를 만난다. 서부 오리건주에도 같은 이름의 더 큰 도시가 있지만 메인주의 포틀랜드는 시인 롱펠로의 고향이자 역사가 더 오랜 도시다. 그 위쪽으로 때 묻지 않은 자연으로 소문난 아카디아 국립공원은 바닷가재가 지천으로 흔해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