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야! 할수 있어"

주니어 이은혜가 15번 코트에 출전하기 앞서 하늘색 원피스로 곱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표정도 환했고 모습도 환했다.
관중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몇 한국 관중들과 일본인, 호주사람 몇몇 정도였다.

전 경기가 끝나 이은혜가 먼저 코트에 입장해 상대 선수를 기다렸다. 은혜는 그 사이 시원한 미네랄 워터 한병을 들고 관중석에 있는 두 동생에게 건넸다. 더운데 언니 따라 다니고 경기보느라 힘들텐데 하면서 동생들을 챙겼다.

이은혜는 주니어 선수 대기실에서 15번 코트로 이동하는 사이 선수 아이디 카드를 떨어뜨렸다. 엄마는 연신 재발급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마했고 나는 지인에게 부탁해 이동경로 거꾸로 다녀봐서 바닥에 떨어진 이은혜 아이디카드를 좀 찾아봐 달라했다 (경기중간에 운영요원이 주워 가져다 주었다).

체어 엄파이어가 두 선수를 코트 중앙에 불러댔다. 토스가 이어지고 서브권이 은혜에게 결정됐다. 두 선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정도의 체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은혜 상대 선수는 초등학교 5~6학년에 불과한 자그마한 체구였다. 과장해 표현하면 네트 91.7cm보다 조금 컸다. 이은혜가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선 출전하기도 어려운데 1승을 하다니.

웜업에 이어 이은혜의 서브로 시작됐다. 더블 폴트 등으로 자신의 서비스게임을 내줬다. 긴장하고 몸이 안풀렸다. 엔드 체인지 하고 나서 상대 나오 사토의 서브역시 작은 키에 높은 토스로 히팅한 것이 네트에 걸리기 일쑤였다. 1세트 1대1.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다 보니 이은혜의 강타가 터졌다. 이에 사토의 양손 스트로크가 작렬했다. 이은혜는 잘 받아치고 무조건 공격했다. 상대가 베이스라인 뒤에 있는 것을 보고도 드롭샷이나 슬라이스는 아얘 이은혜가 구사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마시라. 이은혜는 무조건 좌우 스트레이트, 크로스 백핸드 등을 드라이브 캐논 샷으로 처리했다. 좋은 습관으로 보였다. 경기중 상대의 리턴이 강해 슬라이스나 드롭샷 쓰다 드라이브 스트로크에 자신이 결여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중석에선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트내 6명의 일본 카메라 기자들이 자리를 일제히 뜬 것은 첫세트 5대1 이은혜의 리드 때이고 관중석에 몇 안되는 일본 관중이 자리를 뜬 것도 이때다. 한국선수의 호주오픈 취재를 이리 여유있게 한 경우는 처음이다. 정현의 이번 호주오픈 1회전도 1,2세트 지나서야 승리에 대해 마음을 놓을 정도였다.

그런데 슬슬 사토가 따라붙기 시작했지만 6대3으로 이은혜가 세트를 선취했다. 테니스피플 페이스북으로 이은혜의 경기 동영상 일부와 스코어를 붙였더니 일요일 아침임에도 국내 테니스인들의 반응이 따라 붙었다.

이기겠지했다. "은혜, 잘하고 있어"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나오고 "은혜 화이팅"소리가 은혜의 어깨위에 얹어졌다.

2세트초반부터 접전이었다. 이은혜는 자신의 서브게임은 0-30에서 시작해 어렵게 서브권을 지킨 반면, 사토도 이은혜의 강공에 좌우로 뛰어 다니며 막아댔다. 이은혜가 잘 쳤다 싶은 공이 나오면 사토는 어느새 볼을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수비를 했다. 볼이 베이스라인에서 높게 튄다 싶으면 높은 공 처리를 잘했다. 2세트 2-4 2-5로 벌어졌고 이은혜는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고 빨래줄 같은 랠리를 주고 받은 가운데 2세트를 마쳤다. 작은 날다람쥐의 양손 스트로크에 관중들의 박수가 나왔다. 이은혜도 결정적인 순간에 포핸드 실수가 나온 것 외에는 자신의 샷을 구사했다.

순간 헤드컵 결승때 박소현과의 플레이가 생각났다. 1세트 이기고 2세트 잘가다가 상대가 패턴을 바꿨지만 자신은 그 패턴 그대로 밀고 나가고 백핸드 샷이 네트에 번번이 걸리는, 힘 조절해 연타를 하기보다 강타 일변도로 하다가 패배를 자초하는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래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은혜에게 언젠가 통할 날이 오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 애거시의 말처럼 강타를 하다보면 정확도가 겸비되어 어느 순간 강하고 정확하고 빠른 공이 만들어 진다는 생각이 은혜에게 있는 것 같았다.

"은혜 할 수 있어"라는 말이 관중석에서 나온 것은 3세트 시작 직전이었다. 이은혜는 어리둥절하게 1,2세트를 보내고 나서 별 실마리, 상대 약점을 간파해 득점 루트를 만드는 생각이 표정에 나오지 않아 보였다. 3세트도 2세트처럼 흘렀다.

아쉽지만 이은혜 가족의 멜버른은 여자복식을 남겨둔 채 단식 승승장구의 진도는 여기서 멈췄다.

경기를 취재하면서 테니스는 정말 정교하고 파워가 요구되고 머리가 요구되는 운동이구나 하는 평소 생각이 있었지만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은혜의 경기를 트랄라곤에서 두번 보고, 멜버른에서 한번 보고, 한국에서 수차례 보고 나서 이은혜의 강점이 어느 정도 통했다고 보여진다. 다만 포핸드만큼은 100개중 99개는 들어가야 세계 무대에서 이름 날리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서브는 니시코리가 작은 키에도 밀로스 라오니치와 같은 큰 키의 선수가 점프하는 높이에 근접해 서브를 넣는 것을 감안해 점프 연습이 더 필요해 보였다.

국내에서 세레나 윌리엄스처럼 체격좋은 선수가 몇몇 있다. 장은세나 이은혜가 그에 속한다. 이들은 호리호리한 몸매로 살살치는 테니스대신 시종일관 파워테니스를 구사한다. 이들은 스페인이나 일본의 아카데미에서 다듬으면 경쟁력있는 선수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주머니속에 있는 중국 주니어 우이빙(주니어 톱10)의 스페인 코치가 준 명함만 만지작 거렸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수십년전 테니스로 주니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수하나를 일주일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아침에 일어나 뭘 해야하는 지, 경기가 없는 날 뭘 어찌해야 하는 지에 대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는 듯 종일 스마트폰이나 만지고 있었다.
선수들이 무슨 죄가 있나. 그들을 세계적 수준에 오르지 못하게 한 테니스관계자들의 역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된다.

잘하는 주니어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동행 코치의 주문에 따라 몸을 계속 움직인다. 심지어 책을 보는 선수도 더럿 있다.

하루 프로그램, 일주일 프로그램, 경기전후 프로그램, 경기가 없을때 프로그램 들이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정말이지 세계 무대는 남의 무대다. 여기에 영어 못하면 잘해주는 국내에서만 있으면 된다. 선수들에게 적당히 좋은 국내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대만,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국가의 선수나 코치,심판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된다. 심지어 기자까지도.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구글에서 'tennis'라는 글자를 입력하면 수억건의 문서가 나오는데 한글로 '테니스'를 입력하면 수만건 밖에 나오지 않는다. 테니스세계는 영어로 소통이 된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은혜는 복식 경기를 하고 나서 다음 프랑스오픈 주니어 그랜드슬램 등을 뛸 정도의 랭킹을 끌어올렸다. 호주에 온 박의성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정영석과 한선용, 박소현이 있다. 태국의 내셔널 코치는 우리나라주니어들이 동남아시아무대에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다며 치켜 세웠다. 역대 우리나라 주니어는 강했다. 지금도 강하고 더 강할 수 있다.

이은혜가 호주오픈 본선에 출전한 것이나 박의성이 출전할 뻔 한거나 모두 운이 좋았다. 국내 주니어 어떤 선수도 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세계에서 통하려면 영어와 위닝 샷, 완벽한 포핸드 등등이 필요해 보인다.

취재 후원: 장호테니스재단, 아머스포츠,전현중테니스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