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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와 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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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5  06: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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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야제에 참석한 역대 선수들과 출전자
두 개성사람의 `테니스 사랑싸움'-그 승부의 끝은?

초(草)와 록(綠)은 동색이다. 하지만 초와 록은 누가 더 푸른지를 다툰다.

바로 테니스계에 그런 두 사람이 있었다. 소강(小崗) 민관식(1918~2006) 전 문교부 장관과 장호(長湖) 홍종문(1912~1999) 전 테니스협회 회장이다. 소강은 1960년 1월부터 그해 12월까지 3대 대한테니스협회장을 지냈다. 장호는 1965년 2월부터 1971년 1월까지 6대, 1978년 2월부터 1980년 10월까지 13대 회장을 지냈다.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은 장호가 아직까지 유일하다.  역대 회장 사진을 걸어놓은 서울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 안의 대한테니스협회 사무실에는 소강이 맨 처음, 장호의 사진이 두 칸 떨어져 나란히 걸려 있다. 1, 2대는 왠지 사진이 없다. 대한테니스협회 이진수 홍보이사는 “민관식 회장이 한국 테니스의 대부라면, 홍종문 회장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헌데 이 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다. 두 사람은 모두 개성 사람이고 해방정국에서 서울로 내려와 정착했다. 두 사람은 개성에 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장호는 소강의 형과 막역지우(莫逆之友)였다. 그러나 소강의 형인 중산(重山)이 이른 나이에 숨지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두 사람은 형 동생에서 친구관계로 발전했다.

   
▲ 소강 민관식
 먼저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소강이었다. 고려시보 사장, 대한테니스협회장, 제6대 국회의원에 이어 1964년 대한체육회장에 오르는 등 체육계의 거물로 자리잡은 소강은 당시 계동산업, 대선제분, 조흥화학 등을 창업해 기업활동을 하던 장호에게 체육계 입문을 권유한다. 동향이고 돈도 있으니 체육발전에 이바지하는 게 어떠냐는 뜻으로 그런 것 같다. 마침 개성상고 시절에 연식정구를 경험한 바 있는 장호는 1950년초부터 테니스를 접한 뒤 57년 경성테니스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테니스에 푹 빠져 있었다. 소강은 1999년 장호가 세상을 떴을 때 조사를 통해 “제가 대한체육회장으로 일하던 시절, ‘체육계에서 활동하시며 나라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할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드렸고, 형은 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라고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후 소강은 한국 체육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장호는 테니스계를 대표하는 체육인으로 자리잡았다. 그래도 소강의 테니스에 대한 사랑과 관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1983년부터 학교별 단체경기인 소강배전국중고교테니스대회를 개인적으로 주최해온 것은 그의 테니스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먼저 꿈나무를 키우기 위해 대회를 열기 시작한 것은 장호였다. 장호는 1957년부터 자신이 주도한 경성테니스클럽 주최 전국고교우수선수초청테니스대회를 효시로 하는, 주니어 우수선수 개인대항전인 장호배주니어테니스대회를 개최해왔다. 장호는 회장 시절 처음으로 외국인 코치를 초빙하는 등 테니스 과학화·국제화에 힘썼고, 1971년 사재(당시 2500만원)를 털어 장충테니스코트를 만들어 서울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들은 테니스계를 이끌고, 꿈나무들을 키우고, 테니스인들의 후광 노릇을 해왔다. 삼성증권의 주원홍 감독은 “두 분과 초창기 한국테니스 발전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면서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관계도 있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일반 테니스인들의 눈에도 테니스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근자에 태어난 순서대로 하늘 나라로 갔다. 장호가 1999년 8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소강도 88살의 나이로 2006년 1월 숨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후는 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 장호 홍종문 회장
 장호는 몇 개월 앓다가 숨져 사후에 대한 대비태세가 잘 됐고, 숨지기 직전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수첩을 펴들며 ‘내가 하루에도 이렇게 약속이 많다’고 건강을 자랑하던 소강은 갑자기 불귀의 객이 됐다는 차이가 있지만, 더 큰 차이는 그들의 테니스 사랑을 이어받으려는 후손들의 자세에서 나타나고 있다.
  
 장호의 부인과 3남3녀는 장호가 숨진 뒤 바로 40억원의 사재를 털어 장호체육진흥재단을 만들어, 테니스를 그토록 사랑하던 장호의 뜻을 잘 이어가고 있다. 장호는 장호배테니스대회를 열면서 가족들을 이 대회 뒷바라지와 운영에 깊게 관여시켰다. 대회에 참가하는 수십명의 선수들은 대회 기간 동안 종로구 체부동 자신의 집에 재우며 가족들에게 숙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에서부터 숨지기 20여년 전부터 아들 딸들이 대회 운영도 맡아 하도록 했다. 때문에 장호의 부재에도 장호배테니스대회는 가족의 힘으로 잘 돌아가고 있고, 재단까지 마련됨으로써 대회 영구화의 기반도 마련됐다. 더구나 3남3녀와 손자·손녀들의 테니스 사랑이 장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도탑다.

  반면, 소강은 3남을 두고 있지만 워낙 자신이 발이 넓고 동원력이 있는 탓인지 개인기로 대회를 운영해왔다. 당연히 아들들도 대회 운영에 관여도 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그의 사후에 장호의 자손처럼 적극 나서서 소강의 테니스 사랑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소강이 숨진 뒤 처음 열린 올해 대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 테니스인은 말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장호배테니스대회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제50회 장호배대회를 하루 앞두고 열린 9월17일 장호의 옛 체부동 집에서 열린 선수환영회에 범 테니스인이 총집합해 축하를 해준 것은 이런 상승분위기를 잘 보여줬다. 하지만 올해 34회 대회를 겨우 치른 소강배는 앞으로 대회가 계속 열릴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태라고 이 전야제에 참석한 중견 테니스인을 말했다. 이 테니스인은 “소강배도 워낙 전통이 있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물주가 나타나지 않거나 자손들이 지금처럼 큰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점차 소멸한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소강과 장호의 아름답다면 아름답고 길다면 긴 ‘테니스 사랑 경쟁’. 결국 그 끝은 바톤터치에 성공한 장호 쪽의 승리로 굳어지고 있다. 당대에서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대에도 계속 좋은 뜻이 이어지도록 토대를 잘 갖춰놓는 것, 개인기보다는 조직력의 중요함을 두 사람의 예는 잘 보여준다.  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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