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 회장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향해 한 발이 더 내딛어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원범 부장판사)는 31일 최태원 SK회장에게 징역 4년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이와 함께 최 회장의 동생 최재원 부회장에 대해서는 혐의 전부를 무죄 선고하고 석방했다. 형인 최 회장은 불구속 기소됐었고, 동생 최 부회장은 구속 기소된 상태였다.

재판부는 최 회장에 대한 공소 사실 가운데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는 유죄, 비자금 139억5,000만원을 조성 편취한 혐의는 무죄로 각각 판단했다. “최태원 회장은 성실한 자세와 그 책임의 무거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진실되게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공범으로 기소된 공동피고인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는 변명으로 일관했던 점은 불리하게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양형 사유였다.

재판부가 선고한 4년 징역형은 300억원 이상 횡령·배임죄에 대한 대법원 양형기준 징역 4∼7년의 금고형에서 최소형량을 준용한 것이다. 반면 최 부회장에 대해서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본인이 회삿돈 전용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고, 불법 영득의사를 발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무죄 판단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은 주범인 최 회장에게 징역 4년, 공범 최 부회장에게는 징역 5년을 구형했었다. 지난해 11월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양형기준상 최저 형량인 4년을 구형한 뒤 한상대 검찰총장이 테니스 친구 사이인 최태원 회장에 대한 구형량을 낮추라고 압력을 행사했다가 수사팀의 불만을 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상대 총장은 12월 대검중수부 폐지안 등과 관련한 하극상사태 등 이른바 ‘검난(檢亂)’의 와중에서 사퇴했다.

중앙지법에서 선거·부패사건을 전담하는 형사21부는 이번 판결에 앞서 1월24일 이상득 전 의원에 징역 2년, 정두언 의원에 징역 1년을 선고하고, 현직 의원인 정씨를 법정 구속한 바 있다. 재벌이나 정치인 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법 앞의 평등’을 실천하는 본보기를 잇달아 세운 것이다. 김용준 전 헌재소장과 이동흡 헌재소장후보자 등이 청렴한 법관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을 작게나마 만회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은 이번 재판에서 판결을 받고 반성은커녕 “저는 이 일에 전혀 인볼브(involve)되지 않았고, 전혀 모릅니다”라고 발뺌을 했다고 한다. 절도·폭력 등 범죄를 저지른 돈 없고 힘없는 잡범이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아마 판사로부터 엄중한 훈계를 듣고 가중 처벌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초범이 아니다. 지난 2003년 1조5,587억원의 이익을 부풀린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으로 1심 징역 3년, 2심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다.

한국 재벌들의 도덕관과 윤리의식, 준법정신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는 가운데 최 회장은 사생활 루머까지 얹어져 대표적인 ‘말썽꾸러기 재벌’로 알려졌다. 과거 김대중 정부 당시 대우그룹 해체를 둘러싸고 ‘대사불사론’부터 ‘경제붕괴론’까지 온갖 말이 많았지만 결국 원칙대로 처리한 것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그룹도 범법을 저지르는 총수 한 사람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투철한 경영진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판결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압도적이지만 민변 등에서는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의 양형기준표에 따르면 최 회장의 ‘465억원 횡령’은 횡령·배임죄의 최고구간인 제5유형에 해당한다. 300억원 이상의 제5유형은 기본양형을 5∼8년형으로 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 가중양형 7∼11년, 감경양형 4∼7년으로 권고하고 있다. 재판부가 “해당 펀드를 원래 상태로 회복시킨 것을 참작해 최소양형을 적용한 것”이 국민의 법감정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전경련 등 재계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반(反)기업 정서가 더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며 경제민주화 분위기가 재판에 반영된 결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경제민주화의 반영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는 과정의 한 편린일 뿐이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말 특사에서 ‘외국인 모범수 8명’이 끼여 있었는데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 봐줄 이유가 없고 정치인이나 재벌이라고 관용할 명분이 없는 것이 ‘정상사회’다.

앞으로 지켜볼 문제는 2심에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의 재벌 총수에 대한 ‘정찰제 선고’로 돌아가지 않는지 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의 하수인으로 ‘판결 자판기’ 노릇을 하던 법관 세대가 이제 거의 물러났다면 ‘재벌의 장학생’으로 부정한 돈을 받은 법관들이 있는 세대가 아직 사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번 김승연 한화 회장에 대한 구속집행정지처분을 내린 서울고법 재판부가 그런 사례가 아닐지 의심스럽다. 국민들은 그런 법관과 재판부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엄중하게 비판해야 한다.

우리가 정상사회와 법치국가를 이룩하려면 사법정의가 세워져야 한다. 사법정의는 법관이 부패에 물들거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재벌이 일반 시민과 똑같이 법 앞에 설 때 우리나라는 진정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