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오스타펜코와 ‘도전자’ 쿰쿰의 명승부, 글로는 다 설명이 안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읽어주시기 바란다.

지난 23일 열린 2017 코리아오픈 준결승전에서 옐레나 오스타펜코(라트비아, 10위)가 룩시카 쿰쿰(태국, 155위)을 3-6, 6-1, 6-3으로 힘겹게 물리쳤다. 경기장 직관이나 TV 생중계를 놓친 팬들을 위해 경기 집중분석을 준비했다.

사전지식 : 장단점이 뚜렷한 두 선수

오스타펜코의 플레이 스타일은 ‘닥공’ 한 마디로 정리된다. 어떤 위치, 어떤 자세에서든 상대에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강한 스트로크를 자랑한다. 샷을 감아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스핀에 의해 깊은 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서브는 날카로운 편이 아니며, 샷이 워낙 강해서 네트 대쉬까지 할 필요도 없다.

쿰쿰 역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오스타펜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수비를 하다가 호시탐탐 공격 기회를 노린다. 백핸드는 물론 포핸드도 양손으로 구사하기 때문에 상대의 힘에 밀리는 일은 없다. 단지 포핸드쪽 커버 능력이 떨어진다는 양손포핸드만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샷 보다는 베이스라인 플레이에 치중하며, 서브는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날 경기의 관건은 오스타펜코가 쿰쿰의 포핸드쪽을 어떻게 공략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쿰쿰은 포핸드쪽 깊은 샷이 날아오면 원핸드로 리턴을 하는데, 당연히 투핸드보다는 힘이 떨어진다. 오스타펜코가 공격 범실을 줄이고 각 깊은 포핸드 크로스를 구사한다면 쉽게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1세트 : 쿰쿰은 오스타펜코의 샷을 밀어냈다

0-1 오스타펜코의 첫 서브게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쿰쿰은 오스타펜코의 약한 세컨서브에 한 발짝 전진하며 강력한 백핸드 리턴을 날렸다. 스트로크 싸움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쿰쿰은 “오스타펜코의 강한 샷을 밀어냈다” 고 설명했다. 결국 브레이크에 성공한 쿰쿰은 곧 이은 자신의 서브게임을 볼 4개로 간단히 끝냈다. 3-0까지 달아나며 주도권을 잡았다.

오스타펜코는 1-3에서 상대를 좌우로 흔들며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곧 이은 오스타펜코의 서브게임에서 1세트의 향방이 갈렸다. 브레이크 포인트 위기에 몰린 오스타펜코는 쿰쿰의 포핸드쪽을 집중 공략했다. 5개의 샷이 연속으로 쿰쿰의 포핸드쪽을 강타했지만 쿰쿰은 이를 모두 받아냈고, 오스타펜코가 날린 회심의 포핸드 역크로스가 사이드라인 바깥쪽으로 아웃됐다. 4-2로 앞선 쿰쿰이 결국 1세트를 따냈다.

2세트 : 오스타펜코는 여전히 공격만 했다

2세트는 오스타펜코가 경기를 주도하며 세계 최고 ‘공격수’ 의 위용을 드러냈다. 1세트를 내줬음에도 여전히 공격에 몰두하며 상대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에 쿰쿰은 에러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쿰쿰의 첫 서브게임을 오스타펜코가 브레이크하며 3-0으로 앞서갔다.

2세트 결과는 6-1 오스타펜코의 승리였지만, 쿰쿰도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쿰쿰이 오스타펜코의 포핸드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 서브를 구사하자, 오스타펜코의 밸런스가 무너졌다. 오스타펜코의 포핸드 크로스는 각이 깊지 않았고, 쿰쿰이 양손포핸드를 구사하기 적당한 코스로 볼이 날아왔다. 쿰쿰이 역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3세트 : 이날 경기의 축소판

운명의 3세트. 쿰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치열한 랠리 끝에 오스타펜코에게 위닝샷을 얻어맞은 뒤,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쿰쿰에게 환호했다. 관중들은 이미 쿰쿰의 편에 서 있었고, ‘역시 오스타펜코네’ 라는 쿰쿰의 감정을 공유했다.

상대의 실력을 인정한 쿰쿰은 당시 심정에 대해 “이길 수도 있겠다는 꿈에서 깨어나, ‘나는 잃을 게 없다’ 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쿰쿰은 오히려 랠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0-1에서 오스타펜코는 더블폴트로 트리플 브레이크 위기에 몰렸고, 또다시 더블폴트를 내줬다. 곧 이은 쿰쿰의 서브게임은 볼 4개로 간단히 끝났다. 첫 번째 게임부터 11포인트를 연속으로 따내며 3-0까지 달아났다.

서브가 급격히 흔들린 오스타펜코는 멘탈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 순간 어머니이자 코치인 야코비에바가 다가와 흥분한 오스타펜코를 진정시켰다. 이 온코트 코칭은 경기의 흐름을 다시 바꿨다.

지난 6월 프랑스오픈 결승전. 오스타펜코는 1세트를 4-6으로 내주고 2세트에서 0-3까지 끌려갔다. 코트 반대편에는 시모나 할렙(루마니아, 2위)이 서있었다. 패배 일보 직전에서 오스타펜코는 ‘이 경기를 즐기자’ 고 마음먹었고, 이후 역전에 성공해 롤랑가로스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다시 올림픽공원 센터코트. 0-3에서 오스타펜코는 여전히 쿰쿰에게 끌려 다녔다. 하지만 절대 한 발짝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스타펜코는 자신의 서브게임을 간신히 지킨 뒤, 꽤 오랜 시간 동안 ‘컴온’ 을 외쳤다.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간절한 외침이었다.

3-1로 앞서던 쿰쿰은 이날 첫 더블폴트를 범한 뒤, 혼잣말을 하며 짜증을 냈다. 곧 이어 오스타펜코가 쿰쿰의 포핸드쪽으로 각 깊은 크로스를 날려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이 순간 오스타펜코가 짧고 굵게 외친 ‘컴온’ 에는 경기의 흐름을 가져왔다는 확신이 들어있었다.

3-3에서 오스타펜코의 백핸드가 코스를 가리지 않고 불을 뿜었다. 결국 쿰쿰의 실수로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여기서 쿰쿰도 온코트 코칭 찬스를 썼지만, 이미 경기 흐름은 오스타펜코에게 넘어간 뒤였다. 4-3 오스타펜코의 서브게임은 볼 4개로 마무리됐다.

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 5-3에서 오스타펜코는 쿰쿰을 백핸드쪽 구석으로 밀어낸 뒤, 회심의 백핸드 다운더라인을 날렸다. 백핸드쪽 사이드라인까지 밀려났던 쿰쿰은 포핸드쪽 사이드라인 구석으로 뛰어야 했다. 쿰쿰이 한 손으로 간신히 넘긴다 해도 오스타펜코에게 스매쉬를 얻어맞을 게 뻔했다. 그런데 쿰쿰이 간신히 라켓으로 건드린 볼은 오스타펜코의 오른쪽 네트 앞까지 날아간 뒤, 그대로 서비스박스에 가라앉았다. 순간 올림픽코트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고, 한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쿰쿰은 자신이 오늘의 승자라는 마음으로 왼손을 번쩍 들며 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쿰쿰은 2014년 호주오픈 1회전에서 당시 세계랭킹 6위였던 페트라 크비토바(체크, 13위)를 2-1로 꺾는 이변을 일으킨 바 있다. 쿰쿰은 “호주오픈에서 크비토바를 이겼을 때 마가렛 코트 아레나를 가득 채운 7,500여 명의 관중이 나에게 환호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도 그 때와 똑같은 환호를 받았다” 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진정한 승자는

서두에서 밝혔듯, 이렇게 글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해도 이날 경기의 감동을 오롯이 전달할 수는 없다. 이런 경기는 TV 생중계로도 짜릿함이 전달되지 않는다. 오직 시간과 돈을 투자해 코트에 직접 찾아와야만 공감할 수 있다.

이날 경기의 승자는 ‘골리앗’ 오스타펜코였지만, 관중들이 인정하는 승자는 ‘다윗’ 쿰쿰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진정한 승자는 올해 호주오픈 페더러-나달의 결승전 승자와 같았다. 바로 현장에서 직접 관람한 6,300여 명의 관중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