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고 박의성. 호주오픈 주니어 본선에 출전 신청했다가 본선 대기 5번으로 머물러 예선을 뛰었다. 신청한 것이 첫번째 기회. 예선 1회전이 두번째 기회. 복식 본선 대기가 세번째 그에게 호주오픈 출전할 기회였다 올초 랭킹 150위대에서 인도 주니어대회에서 얻은 점수 100점을 보태 63위로 올라 40점만 더보태면 다음 프랑스오픈은 본선 직행이다

한 학생선수가 우승 트로피 3개를 들고 내 곁에 다가왔다. 인도 뉴델리에서 12시간 비행기를 이코노미석에 꼼짝앉아 호주 멜버른으로 날라왔다.

아래는 그 선수를 일주일간 지켜보고 스토리를 재구성했다.

호주오픈 주니어대회 본선 대기 5번. 꿈에 부풀었다. 우연히 신청한 대회를 철회하지 않고 버틴 결과 본선 대기 5번에 이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본선 자동출전자 가운데 3명만 빠지면 본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기 1,2번에게는 자동으로 본선 와일드카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2명만 빠져  대기 1번. 32명이 치르는 예선에선 인도에서 딴 점수가 있어 63위 자격으로 예선 1번 시드를 받았다.

수시로 핸드폰으로 대회 상황을 보다가 결국 멜버른에서 두시간 반 거리에 떨어져 있는 트랄라곤으로 이동했다. 멜버른 다시 올 마음으로 라켓과 갈아입을 옷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멜버른 아파트에 뒀다.

예선 전날 출전 사인을 한 뒤 대회장을 둘러봤다. 평소 대회장에서 만나는 낯익은 선수들도 있고 중국 청두 4그룹대회 왕경 토너먼트 디렉터의 반가워하는 얼굴도 마주쳤다. 잠잘 곳을 구하고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해야 했다. 대회장 주변 모텔, 호텔은 선수들로 '빈방 없음(no vacancy)'이었다.

할 수 없이 호텔스닷컴 사이트를 핸드폰으로 찾아 그나마 최저가 모텔을 찾아 예약했다. 택시비는 15달러. 모텔 주변에 주유소 편의점 밖에 없었다. 편의점에서 잔자렌지에 데워먹을 수 있는 것과 물 끓여 먹을 수 있는 컵 라면 등으로 요기했다. 알아 들을 수는 있어도 말은 어눌한 상태에서 선수 사인, 대회 출전, 모텔 예약, 먹을 것 구매 등등을 홀로 해결해야 했다. 하다 못해 교통카드 사서 기차타고 이동하고 기차간에서 검표원이 카드 체크하는 것에 순순히 응해야 했다. 얼마나 갈 지 모르는 기차간에서 졸면서 내릴 역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튼 경기만 잘하면 됐다.
TV로 호주오픈 프로들의 경기가 나오지만 티비를 끄고 9시반에 정확히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조용한 모텔방에서 잠이 들었다. 물론 핸드폰 알람 기능을 이용해 7시반에 기상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인도 2주간의 일정이 피곤해서인지 잠을 잘 자고 일어났다. 역시 주유소 편의점에 가서 아침꺼리를 찾고 전날 먹다 남은 피자 한조각을 전자렌지에 데폈다.

경기는 오전 12시부터 시작했다. 상대는 전혀 만난 적이 없는 호주의 포피린. 주니어 톱10 알렉산더 포피린의 동생이다. 랭킹은 낮지만 체격이 좋고 파워가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1세트 0대3으로 끌려다녔다. 서브가 좋고 리턴과 포핸드 무기가 있었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어댔다. 쉽지 않았다. 두번만 이기면 대망의 그랜드슬램 본선 진출이 녹록하지 않았다. 우여곡절끝에 5대 4를 만들었지만 서브게임을 지키지 못해 5대5, 이어 5대6으로 몰렸다. 간신히 타이브레이크를 만들었지만 힘이 빠졌다. 타이브레이크 1대 5까지 벌어졌다. 첫세트를 내줄 판. 끝까지 따라가며 역전을 노렸다. 내리 5점을 빼내 타이브레이크 6대 6까지 갔지만 7대 9로 내줬다.

순간 많은 대회 관계자와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예선 1회전 마지막 경기라 다들 박빙의 승부를 지켜봤다.

2세트는 서브게임을 하다 4대4에서 6대 4로 마무리했다. 상대 선수 포피린이 라인 시비를 하고 라켓을 가방에 패대기 치는 등 분위기 전환을 위한 행동을 해댔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자세를 펴고 걸어 자리로 돌아왔다.

3세트. 이것만 이기면 일단 첫 관문 통과다. 팽팽하게 가다 역시 막판에 서브게임을 지키지 못했다. 어깨 통증이 왔다.
결국 게임을 내주고 그랜드슬램 본선 진출은 다음 프랑스오픈때나 기다려 봐야했다.

게임 지고 라운지에 들어오니 다음날 연습상대를 해달라는 한 선수의 요구가 있었다. 기분 유쾌하지 않은데 연습상대라니. 바로 짐싸서 트랄라곤을 빠져 나가고 싶었지만 토너먼트에 하루라도 더 있어 분위기를 파악할 겸 연습에 응했다.

대회본부에 택시를 불러달라하고 모텔로 돌아와 쉬었다. 허탈감에 배가 갑작스레 고파왔다. 모텔 바인더에 있는 배달전문 음식 한두가지를 프론트에서 직원에게 시켜달라하고 저녁식사를 했다.

반 밖에 먹질 못했다. 욕심같아서 시킨 것 다 먹을 것 같았지만 목에 넘어가지가 않았다. 자꾸 생각이 났다. 막판 힘을 좀 내려 했는데 힘이 나지 않은 것이 좀 아쉬웠다. 마음먹은 데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모든 짐을 챙기고 택시불러 경기장에 도착했다. 본선을 위한 선수들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웬지 주눅이 들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연습 해달라는 선수를 만나 연습한 뒤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오늘은 바람도 안불고 맑은 날씨여서 경기하기 좋아 보였다. 이은혜의 승리 소식을 뒤로 한 채 멜버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굼벵이처럼 느리게 가는 기차에서 머리가 복잡했다. 멜버른 가서 뭐하지?

멜버른에 도착해 짐을 놔 둔 아파트에 들어갔다. 피곤이 몰려와 쇼파에서 골아떨어졌다. 일어나보니 밤중이었다.  아파트 아래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가서 스파게티 등을 사서 먹었다. 한국 여행사에 연락해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봐 달라했다. 그 와중에 호주오픈 복식 본선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넣자는 선수들에게서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한번 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기자(alternate)라는 신청 제도가 있어 일단 본선에서 갑자기 출전 철회를 하거나 부상으로 단식에서 기권을 하고 복식마저 위드 드로 하는 경우에 대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21일 토요일. 프로들 경기를 볼 요량으로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선수 어크레디테이션(아이디 카드)이 없기에 일반 관중 줄에 서서 티켓을 사서 입장하려고 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앞에서 5명을 앞두고 표가 매진됐다. 60달러하는 일반 입장권(그라운드 패스)이 다 매진됐다니 이해가 안갔다. 할 수없이 발길을 돌리려다 어크레디테이션 안내 창구에 가서 이름을 댔다. 직원은 카드 발급 대상이 아니라고 답했다. 아마도 본선 선수가 아니라 그런 것 같았다. 본선은 아니지만 본선 대기선수라고 하니 그 담당자는 주니어대회본부에 전화를 걸어 신원 확인을 했다. 10분 뒤 연락이 왔다. 복식 본선 대기 선수이니 카드를 만들어주라는 것. 스티커를 발급받아 대회장에 입장하고 카드 정식 발급하는 곳에 가서 인적사항을 적고 호주오픈 아이디 카드를 받았다. 유통기한은 복식 본선 대기 선수가 소멸되는 22일까지다. 아무튼 입장에 성공했다.

입장하고 나서 여기저기서 동시 다발적으로 하는 프로들 경기를 봤다. 그랜드슬램 본선 무대에 꼭 서고 싶었다. 주니어대회는 물론이고 프로무대에 서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조코비치를 이긴 이스토민, 다비드 페러, 즈베레프, 나달, 고팽. 보고나니 프로들은 키와 관계없이 몸통 두께가 굵어보였다. 몸집이 커져야 프로 선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니어 단식 1회전도 가서 봤다. 평소 대회에서 내게 졌던 선수들이 본선에서 당당히 싸우고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귀국하면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소통하고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경기일정표가 나오면서 맨 아래에 주니어남자 복식 얼터네이트(대기자) 사인을 내셔널테니스센터 주니어 데스크에서 두시에 한다고 하니 일단 짐 챙겨 가보기로 했다. 라켓 세자루에 스탠실도 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귀국 비행기는 일단 23일 오전으로 해놓고.

다음날 경기장만 배회하고 기권 선수 하나도 나오지 않아 복식 본선 대기 사인한 것도 무용한 채 경기장을 떠났다. 중국 친구들이 너 왜 본선 못올라갔냐며 한마디씩 던졌다. 애이.

23일 자정. 니시코리와 페더러의 경기를 TV로 보면서 짐을 쌌다. 크고 작은 가방은 4개. 멜버른을 아침 7시에 떠나 홍콩 들려 6시간 기다리다 인천공항가는 비행기다.  옷은 트레이닝복 하나다. 서울은 영하 10여도를 넘나든다데 벌써부터 추위가 다가온다. 새벽 5시 길가는 택시를 집어타고 멜버른 공항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귀국해 무엇을 할지. 대만 아카데미로 바로 가야 할 지, 아니면 좀 더 지체하다 갈 지 고민이 많다. 3월에 태국에서 열리는 1그룹대회 출전도 있다. 대회 참가 일정을 어찌 잡아야 할 지도 막막하다. 1,2 그룹만 나가야 할 지, 아니면 3그룹도 병행해야 할 지. 매니지먼트사도 없고 그저 아버지와 의논하고 학교 감독선생님, 코치선생님과 이야기해 결정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