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장충장호테니스장에서 장호 홍종문 회장이 생전에 만드신 주니어테니스대회가 후손들에 의해 지금도 열린다

서울에 수많은 명소가 있지만 이곳만큼 많은 이의 추억이 중첩된 곳도 드물다. 오붓한 데이트 코스로, 선거유세장으로, 운동과 산책, 가족 휴식처로 시민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 바로 장충단공원이다. 테니스인에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한국 테니스의 요람 장충코트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배호의 명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은 그곳에 가본 적조차 없는 신세대들까지 다 안다. 그런데 왜 하필 ‘안개 낀 ~’일까. ‘돌아가는 삼각지’는 로터리니까 그렇다 치자. 장충단공원은 웬 안개? 가보면 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진입하면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옮겼다는 수표교가 방문객을 맞는다. 공원은 남산의 북동쪽 기슭이다. 해가 일찍 진다. 게다가 개천이 흘러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그런 만큼 아침저녁 안개도 잦을 터.

수표교 너머 장충단비가 어색하게 서 있다. 이 역시 제 자리가 아니다. 1969년 신라호텔 영빈관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순종이 황태자 시절 쓴 ‘奬忠壇’ 세 글자가 선명하다. 장충단은 근현대 민족수난사의 현장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00년 세웠으나 일제가 폐사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 피살 이후에는 그를 추앙하는 박문사가 들어서기도 했다.

테니스장은 공원 내 배드민턴장과 리틀야구장을 지나 국립극장 아래쪽에 있다. 메인코트와 8개 일반코트가 갖춰져 있다. 43년 전 건립 당시 그대로다. 물론 바닥은 클레이에서 1979년부터 하드코트로 개수됐다. 메인코트를 둘러싼 축대 한 편에 낡은 동판 기념패가 붙어 있다.

장호 홍종문(1912~1999) 선생이 사재 2500만 원을 쾌척해 1971년 9월13일 대한테니스협회 전용코트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당시 2500만 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17억 원(금 시세 기준)에 해당한다. 장호는 문교부장관을 지낸 소강 민관식(1918~2006)과 함께 한국 테니스를 이끈 양대 거목이다. 장충테니스장은 지난해 11월 장충장호테니스장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후손들이 설립한 장호테니스재단(이사장 류재성)과 대한테니스협회(회장 주원홍)는 서울시의 개칭 승인을 받아 명명식을 열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 지난해 11월 세워진 장충장호테니스장 입간판 제막식에 참여한 테니스인들왼쪽부터 장호테니스재단 홍순모 집행위원장, 박용덕 전 대한테니스협회장, 한상원 전 대한테니스협회장, 주원홍 대한테니스협회장, 배준영 한국여자테니스연맹 회장, 류재성 장호테니스재단 이사장, 문상모 서울시의회 의원, 이형택 아카데미원장, 앞줄 김다혜 선수, 강구건 선수

테니스박물관 설립 제안 ‘눈길’

테니스장은 개장 직후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를 연 데 이어 장호배 주니어대회 등을 통해 수많은 유망주들을 발굴했다. 프로테니스선수 1호 이덕희를 비롯해 김봉수, 전영대, 유진선, 이형택, 조윤정 등 한국 테니스의 얼굴이라 할 선수들이 모두 장호배와 장충테니스장을 거쳤다. 테니스인들이 단순한 코트를 넘어 한국 테니스의 메카로 여기는 게 무리가 아니다.

43년 세월 속엔 선수뿐 아니라 저명인사들과의 인연도 쌓여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9년 간 신당동 사가에 살 때 박 대통령은 장충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며 절망과 울분을 달랬다. ‘칩거’라 표현되는 그 상실의 시기에 테니스는 박 대통령에게 하나의 숨통이자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였다. 박 대통령이 얼마 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종교인들을 만나 “(가족을 잃은 뒤) 희망과 삶을 다 포기할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언급했던 시절이다. 박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때부터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테니스를 치곤 했다고 한다. 당시 출입기자와 지인들이 박 대통령의 운동 파트너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후배로 친분이 있었던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도 1980년 몇몇 교수들과 함께 거의 매주 장충코트에서 박 대통령과 테니스를 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충테니스장은 연륜을 더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87년 올림픽공원 테니스장이 생기면서 대표코트 자리를 넘겨주었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엔 이른바 남산 르네상스 계획에 따라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체육계와 시민들의 반대로 겨우 존치됐다. 지난해 3월부터는 민간업체에 운영권이 넘어가 동호인 임대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클럽하우스를 포함한 시설이 낡고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통은 하루아침에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도 대다수 테니스인들은 장충코트를 한국 테니스의 고향으로 여긴다. 관중석을 제대로 갖춘 개폐식 메인코트를 짓고 내부에 테니스박물관을 두자는 제안은 그래서 갈수록 설득력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