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자녀의 편법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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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아들이 올해 서울 영훈국제중학교에 ‘사회적 배려 대상자(사배자)’ 전형을 거쳐 합격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이 지난 2008년 이혼해 한부모가정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전체 정원의 20%(32명)인 사배자 전형 대상은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 등 경제적 배려대상자와 한부모가정·다문화가정·탈북자자녀 등 비경제적 배려대상자로 나뉜다. 일반전형(128명)은 서류심사로 3배수를 추린 다음 추첨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유력자 자제라도 마지막까지 탈락 가능성이 있는 구조다.

이 부회장의 아들은 영훈국제중과 같은 계열인 영훈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영훈초는 강북에 있지만 강남의 부유층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명문학교로 알려져 있다. 영훈국제중은 영어로 교과 수업을 하고 1년 학비가 방과후 활동비까지 1,0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과 학교측은 “선발과정에 법적 하자가 없다”는 입장이고 삼성그룹은 “한부모가정 자녀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정서적 약자”라고 말했다.

부모 맘으로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고 갑자기 낯선 환경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뜻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삼성그룹의 손자라 하더라도 인지상정은 누구나 똑같다. 그러나 특권의 상징인 재벌가의 손자가 ‘사회적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니 우리가 불우이웃 돕기 차원에서 모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은 ‘언어의 왜곡’을 지나 아예 ‘언어의 재창조’라는 생각이 든다.

한부모가정 자녀라고 하면 부모가 이혼했거나 부모 가운데 한쪽이 돌아가셨든지 또는 가출해서 행방을 모르는 상태 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부모가 성격 부조화나 다른 이유로 이혼해서 아버지나 어머니 한쪽의 품에서 자라는 것을 왜 사회가 배려해줘야 하는지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사회나 국가에서 부모가 이혼하도록 시키거나 유도한 일은 없는 것 아닌가.

한부모 가정 자녀가 마음의 상처나 왕따 등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학교나 사회가 배려해 준다는 것이라면 몰라도 일반 가정의 다른 학생이 들어갈 수도 있는 자리를 굳이 이혼가정 자녀에게 준다는 것이 꼭 옳을까? 사배자 정원은 일반 정원에 추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이고, 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말기 바란다. 그것은 조삼모사 식의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첨조작까지 안 가고 확실하게 합격을 보장받기 위한 편법 입학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부회장 아들 입학 사실이 22일 처음 보도된 이후 각계 반응 등 속보가 이튿날에도 이어졌는데 23일 오후5시 현재 조선·중앙·동아와 한겨레·경향·한국·서울신문, 연합뉴스 등 8개 매체 가운데 당일자 관련 기사를 온라인판 메인페이지에 싣고 있는 것은 <경향>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한겨레><한국><연합>은 검책창에 ‘이재용’이라고 쳐 넣었을 때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라도 있었지만 <동아><서울><중앙>은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대부분은 기사를 저 안쪽으로 치웠고, 일부 신문은 아예 기사를 빼서 내다 버렸다. <중앙>은 처음부터 보도를 안 했을 것이고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 가운데 특권층은 재벌이다. 정치인은 선출직을 유지하는 동안 권력을 갖고, 관료들은 정년이 되면 물러나지만 재벌들은 대를 이어 부와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도구로 키워진 재벌이 이제는 정치권력을 누르고 관료를 부리며 언론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재벌가의 자식을 사회적 배려로 입학시키고도 떳떳이 얼굴을 들고 있을 뿐 아니라 언론보도를 통제하려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오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들의 막강한 금권에 눌려 최소한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언론은 얼마나 딱한가.

최근 대학입시에 학생 뽑는 전형방법을 다양화하는 현상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KBS 등 일부 공기업에서는 지역쿼터를 도입했다. 과거에는 자식을 명문대학에 들여보내는 편법으로 일부에서 재외국민 특례입학을 이용됐다. 지금은 특별전형이 하도 다종다양화해서 전문가가 아니면 그 종류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한다. 돈과 정보가 있는 사람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대입전형의 ‘미로‘를 뚫고 자녀를 이른바 ’일류‘대학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얘기다.

외무고시와 5급 공채(행정고시), 사법시험도 비슷한 길을 밟고 있다. 1980∼90년대 외교부 고위직 자녀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교육을 받아 외무고시를 통과할 실력이 없었다. 외교부 간부들은 강력한 로비 끝에 1997년 ‘외무고시2부’라는 제도를 만들어 해외교육 이수자와 외국어 능통자를 따로 선발했고 당연히 고위직 자녀들이 많이 뽑혔다. 사법시험이 로스쿨 설립과 함께 폐지되고, 5급 공채가 특채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도 맥락을 같이하는 면이 있다.

한국사회가 전쟁을 겪은 지 60년이 지났고 경제발전과 함께 사회안정도 정착돼가고 있다. 올해는 대통령의 자녀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이와 더불어, 사회 전반적으로 부의 대물림과 함께 ‘지위의 세습’을 위해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독점하려는 욕심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나아가 국가 지도층이나 상류계층일수록 그들의 신분과 특권을 세세상전(世世相傳)하려는 의지가 거의 예외 없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관리를 시험으로 선발하는 과거제도는 중국 외에 한국과 베트남에서만 지속적으로 실시됐다. 과거의 공정성이 유지되는 한 왕조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험은 우리 문화에 중요했다. 대학입시나 언론사·대기업 채용시험에서 순수하게 시험성적만으로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대학입시의 공정성은 일종의 성역으로 여겨질 만큼 당연한 일이었고, 인재가 모자랐던 개발시대의 입사시험은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면접시험 성적을 배제하고 필답시험 성적만으로 뽑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국립대 입시와 공무원 채용시험은 시험관의 주관적 평가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와 친분, 뇌물을 이용한 입시부정이나 인사청탁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면 말이다. 다만 중견직이나 고위직 공무원을 발탁하려면 시험으로 뽑기가 어려운데 이때는 공식으로 인재를 추천하는 절차를 만들어 놓고 뒷날 피추천자가 어떤 형태라도 잘못을 범할 경우 추천자가 상응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옛날 제도를 되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