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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여자의 창]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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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20  10: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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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저자/ 이 정 순
약 달이는 탕제기를 구입하기 위해 수소문 중이다. 가마솥이 좋은 건 알지만 요즘은 구하기가 어렵다. 돌이나 질그릇이면 가마솥을 대신할 법한데 내가 달이는 약은 분량이 많아서 그런 용기로는 곤란하다. 옛날 그릇을 대신 하는 개량된 탕제기를 제조한다는 공장을 찾아 대전으로 향했다. 하루를 꼬박 걸고 왕복하면서 내가 원하는 크기로 특별 제작을 요청했다.
약속된 날짜에 탕제기는 도착하였고 가스를 설치하고 한 아름도 더 되는 대형 탕제기에 약을 집어넣었다. 달이는 과정에서 약효의 손실을 최소화 시키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야 할 과제도 걱정이다. 약을 달일 때는 약한 불에서 서서히 달여야 한다. 느린 박자를 익히지 않으면 달일 수가 없다. 끓이는 게 아닌 달여야 하는 기다림 후에 약은 검은 물빛을 토해내며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아 준다.
나와는 띠 동갑인 언니가 있다. 맏언니로 태어난 죄로 친정의 대소사를 솔선수범하던 언니가 회갑을 넘기고부터 수시로 잔병치레를 하더니 덜커덩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이유 없는 피로에 시달리다가 검진삼아 들른 병원에서는 몸 한 부분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이 떨어진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어머니 같은 언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에 내 귀는 먹먹하기만 했다.
수술실 앞에서의 기다림이란 그 얼마나 느리고도 지루했던가. 입이 바싹 바싹 탔지만 조급해한다고 해서 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게 수술이다. 몸 일부분에 불필요한 종양을 제거하고 또 다시 달라붙을 위험 요소를 차단시키는 과정이 기다리는 내내 아득하기만 했다. 한나절을 외로움에 사투를 벌인 언니가 건조해진 입술로 실려 나왔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파리한 입술을 보며 작은 힘이나마 되고 싶었다. 마취가 풀리며 통증으로 고통 받는 와중에 눈 한 번 뜨는 것이 느리고도 느렸다. 숟가락 하나 잡기까지도 하루가 걸렸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란 영영 어려울 수도 있고 그만큼 모든 것이 느리기만 하다. 예순 넘은 성인이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이나 화장실 가는 것 하나조차도 그렇게 천천히 돌려받고 있었다.
늘 곁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고 살아온 사소한 일상마저도 느림보 걸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서 더 잃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전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항암제에 특효라는 약을 구했다. 현대 의학과 대체 의학을 겸비 했을 때만이 언니를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귀한 약인만큼 어렵게 부탁을 해서 손수 달이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집을 등 뒤에 지고서 기고 또 기어야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달팽이처럼 언니도 그렇게 느림의 미학을 다시 익히고 있었다. 고통 받는 그 모습이 하도 아파서 나도 언니의 걸음에 맞추어 느린 동작으로 약을 달였다. 느리게 오는 열을 받아서 서서히 달궈지는 탕제기의 원리를 익힌다.
잠든 언니를 내려다본다. 쉼표 없는 책을 읽을 때 오는 호흡 곤란처럼 갑자기 숨이 차다. 약을 달이는 것처럼 느리고 길게 온 세월을 엮어준 자매라는 인연의 끈은 모체로부터 받은 원죄다. 바쁘게 살아온 언니의 삶이 과속에서 벗어났으면 싶다. 놓쳐 버린 것들을 되돌려 받기에는 쉽지가 않고 영영 되받지 못하는 게 많다. 지나버린 어제는 이미 역사고 내일은 아무런 보장이 없는 숙제라고 보면 오늘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물이다.
누리기보다 양보가 습관처럼 따라 붙었을 언니의 삶을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다. 남보다 느려서 잃어버린 게 아니라 서두르고 허둥대다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대화로 자매의 정을 나눈다. 병실 창가의 서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석양이 저 편에 지고 있다는 것도 둘이서 함께 느낀다. 붉은 빛을 토하며 아주 느리게 지는 노을이나 서서히 검은 빛을 자기 몸에서 뱉어내는 약물을 보며 느림의 미학을 잊고 산 어리석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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