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단식에 전격 기용된 국가대표 10년차 임용규가 해결사 노릇을 한 뒤 어퍼컷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 이 경기의 기억은 선수나 감독, 팬들에게 오래 남을 듯하다
14일과 15일 경북 김천에서 뉴질랜드와의 데이비스컵 1그룹 잔류전이 열렸다.
정희성 감독은 임용규 이덕희 홍성찬 이재문 손지훈 김영석을 선발해 대표팀을 꾸렸다.
대회전에 세계 복식 50위안에 있는 선수들 3명이 있는 뉴질랜드에 일단 복식은 이기기 어렵다고들 판단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 이덕희가 두 단식을 이기고 홍성찬이 한 단식만 이겨주면 되는 작전으로 대회에 임했다.
코트는 서브 강한 뉴질랜드 복식 선수에게 유리한 페이스가 빠른 김천실내테니스장, 상대 선수들은 국가대표를 10년 이상씩 한 베테랑들인 반면 우리는 대표팀 맡은 지 몇 달 안되는 신선한 감독, 데이비스컵 19경기를 뛴 임용규, 5번을 뛴 홍성찬을 제외하고 이덕희는 두번, 이재문은 한번 경기를 한 초보 선수들로 팀이 짜였다.
홈코트라곤 하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회였다.
하지만 이 경기를 보려고 팬들은 500여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초등학생부터 80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막대 풍선을 두드렸다.
14일 첫날 첫 단식에 나선 홍성찬은 베테랑 루빈 스태덤의 정교하고 강한 플레이에 눌렸다. 두번째 단식에서 에이스 이덕희는 첫게임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고 상대 마이클 비너스는 200km에 육박하는 서비스를 펑펑 터뜨렸다. 게다가 서브 넣고 네트 대시해 발리로 득점하는 플레이가 수시로 나왔다. 베이스라이너 이덕희는 상대 서비스게임은 손도 못댔다. 어떻게 이겼을까. 총쏘듯 빠르고 강한 직선타로 장신 서브앤 발리 플레이어를 뚫었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단식 경기 경험이 거의 없는 복식전문 선수라 네트 앞에 자리 잡지 못한 채 베이스라인에서 플레이를 하면 불안해 했다. 반면 이덕희는 한국의 니시코리였다. 빠른 라켓 스피드와 직선과 크로스로 그라운드 스트로크를 했다. 상대가 네트앞으로 대시하면 상대 백핸드 쪽 작은 구멍을 보고 백 핸드를 구사했다. 통했다. 그곳이 통하니 상대 포핸드쪽이 비고 서브앤 발리가 둔화됐다.
벤치에 있는 정희성 감독의 박수가 연신 터져 나왔다. 일단 이덕희의 단단한 플레이에 관중들은 만족해했다. 뉴질랜드 헌트 감독은 경기 뒤 이덕희와 악수를 하며 격려하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자실에 들어온 마이클 비너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전 인터뷰때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첫날 단식 2승을 기대했던 대표팀은 고민에 빠졌다. 복식은 이기기 어렵다보고 복식 주자 임용규를 단식에 투입하는 극단 처방이 결론으로 나왔다.
정 감독은 임용규의 데이비스컵 경험과 서브를 믿었다.
대회 마지막날인 15일 11시. 이재문과 홍성찬이 코트에 등장했다. 뉴질랜드도 마커스 다니엘을 빼고 19살 아지트 라이를 넣고 아르템 시탁이 복식에 출전했다. 양 팀 선수 변경을 했다. 연습때 마커스는 언더서브를 넣어 출전이 어려운 부상임을 암시했다. 아지트 라이는 단식 주자로 데려왔다가 복식에 투입했다. 지난 2월 중국의 장제와 공마오신 복식조에 패한 뉴질랜드는 혹시 복식을 지더라도 루빈 스태덤과 마이클 비너스가 이덕희, 홍성찬을 이길 것으로 보았다. 스태덤이 이덕희를 이기면 비너스가 홍성찬은 이길 것으로 예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복식에 아시안게임 8강팀 이재문과 홍성찬을 넣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혹시 이기면 이덕희가 스태덤을 단식에서 이기면 끝나는 것이고 혹시 복식 패하더라도 이덕희와 임용규가 단식에서 이기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이덕희가 게임을 놓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은 기본이었다. 대표팀은 이덕희를 믿었고 임용규에게 확신을 걸었다.
복식 1세트 5대3 40-15. 라이브 스코어를 보고 코트로 오는 차량 안에서 이덕희는 복식에서 이긴다 보고 필승을 다짐했다. 복식은 다잡은 고기 놓친 것처럼 되버렸다. '불펜'에선 엄청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코트에 도착한 이덕희는 자신이 이겨도 주장 임용규가 이겨야 팀을 2그룹 강등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덕희는 투어선수처럼 세트 막판 뒤집기에 성공해 승기를 잡고 2세트 초반 고삐를 바짝죄고 끝냈다.
20분의 휴식시간동안 관중들은 공복감을 메우느라 분주했고 끝까지 간 승부를 보려고 다시 자리를 찾았다.
임용규가 등장했다. 2009년 이후 20번째 데이비스컵 출전이다. 관중석에 임용규 선수의 아내와 아버지,어미니가 자리를 잡았다. 가족들은 임용규의 단식 출전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차분하게 지켜봤다. 임용규는 "서비스게임을 잘 지키다가 기회를 엿봤다"고 한 경기 뒤 인터뷰에서처럼 상대 비너스의 강서브는 흘려 보내고 자신의 서비스게임 지키기에 치중했다. 15-40에서도 집중해 지키며 내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1세트 타이브레이크 가면 어렵다고 본 결과는 임용규의 승. 2세트 초반 브레이크하며 승부수를 던진 임용규는 비록 자기 게임도 브레이크 당해 원점이지만 그래도 3세트 안가고 2세트에서 끝내려는구상이 맞아 떨어졌다. 매치포인트에서 임용규는 티존을 향해 서브를 넣었다. 비너스의 포핸드 리턴볼이 네트 중단에 걸려 게임이 끝나자 임용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코트에서 포효했다.
이덕희가 2승 바탕을 깔고 임용규가 해결사 노릇하는 소중한 1승을 하며 뉴질랜드를 종합전적 3대2로 이겼다.
임용규는 경기 뒤 응원해준 관중들에게 자신의 가방에서 국가대표 티셔츠를 모두 꺼내 나눴다. 모자에 사인을 해 전달하고 손목에 찬 밴드 등 자신의 수중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경기뒤 대표팀은 어깨동무를 한 채 둥글게 원을 그려 코트에서 돌며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대회 기간내내 대표팀 경기를 지켜본 장호테니스재단 김두환 이사장은 선수들을 코트에서 격려했다.
정희성 감독은 "어려운 여건에서 선수들 모두가 합심해 잘해주었다"며 팀에 감사 인사를 했다.
마지막 단식에서 이긴 임용규는 "오랫만에 단식에 출전해 몫을 다한 것에 기쁘다"며 "앞으로 대표팀이 월드그룹 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수훈갑인 이덕희는 "앞으로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뛰겠다"며 "이번 데이비스컵 출전 경험이 투어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뉴질랜드전 데이비스컵은 한정된 자원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 코트에 쏟고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의 대화속에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