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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와 테니스의 상관관계
박원식 기자  |  editor@tennispeop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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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5  06: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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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부터 홍콩국제대회 단식과 복식 우승한 정보영(오른쪽), 투어대회 출전하며 성적올리는 정현, 챌린저대회 첫 4강 진출한 정윤성(가운데)

정현, 정윤성, 정보영. 최근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내며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선수들이다. 정윤성의 경우 정현 동생이냐고 묻는 외국 테니스 관계자가 많다고 한다. 영어 표기로 두 선수 모두 자신의 성을 영어 표기로 CHUNG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한국다문화센터 김성회 사무총장의 정씨 성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씨(鄭氏)에는 같은 발음을 갖는 鄭·丁·程 등 3개의 성이 있다. 그 중 丁씨와 程씨는 모두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며, 鄭씨는 토착 성씨이다. 물론 토착 성씨인 鄭씨에도 서산정씨와 당야정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다. 그 외 경주정씨를 비롯한 정(鄭)씨 대부분은 신라 건국에 기여한 6부 촌장 중의 하나인 진지촌(珍支村) 지백호(智伯虎)의 자손이다.

현재 정씨는 286개 성씨 중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다. 2000년 인구조사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정씨는 동래·영일·경주 등 138개 본관이 있으며(조선시대에는 247개 본관이 있었다), 62만6000여가구에 총 20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중 사람 수가 2000명 이상인 본관은 39개에 이르고, 한두 가구만으로 이뤄진 본관도 6개에 달한다.

인구 기준으로 가장 큰 정씨 본관은 동래정씨로 총인구가 42만여명에 달한다. 그 다음이 영일정씨(34만여명), 경주정씨(30만여명), 진주정씨(24만여명), 하동정씨(16만여명) 순이다. 그 외에도 광주정씨, 나주정씨, 진주정씨, 해주정씨 등 40여본이 정씨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정씨의 도시조인 지백호 묘역, 지백호는 신라를 건국한 6부족 중에서 취산 진지촌의 촌장이었다. 유리왕 때 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태종무열왕 때 감문왕으로 추봉되었다.
정씨의 기원

앞서 말했듯이 정씨의 시조는 신라 6부족 중의 하나인 진지촌 지백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백호는 한무제 6년(기원전 117년) 경주 화산에 강림하여 부족국가이던 사로의 여섯 고을 중 취산 진지촌을 다스리면서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 후 ‘유리왕(2대) 9년 6부의 명칭을 개명하고 개국공신인 6부 촌장에게 성을 하사했는데, 진지부를 본피부(本彼部)로 정하고 정씨 성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는 ‘알천 양산촌의 촌장은 알평이며,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고,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는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며, 무산 대수촌의 촌장은 구례마로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라고 하고, ‘진지촌의 촌장은 지백호이며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즉, 소벌도리와 지백호에 대해 최씨와 정씨의 조상으로 엇갈려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술에 의거하여 소벌도리는 최씨의 시조로, 지백호는 정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정씨의 본관별 대종회에서도 정씨의 원시조를 지백호로 기술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는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서 524년이 지난 29대 태종무열왕 3년에 ‘진지부 촌장 지백호를 감문왕에 추봉한다’는 기록이 있어, 과연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에게 성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태종무열왕 때 와서도 본피부로 바꾼 진지부를 계속 진지부로 호칭하고 있고, 정씨 성을 하사받은 지백호에 대해서 여전히 지백호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 왕족이 김씨와 박씨 성을 쓴 것이 진흥왕 이후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6부족의 후예들이 자신의 성씨를 쓴 것은 그 이후가 아닌가 추정된다. 왜냐하면, 진흥왕순수비를 보아도 부족 이름과 촌장의 이름은 나오지만, 여전히 성씨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3개의 왕족과 6개 부족의 협의로 국가를 이끌어왔고, 또 각 부족이 그 조상에 뿌리의식과 숭배의식을 지녀왔다는 것을 추정할 때, 정씨 성을 쓴 것이 통일신라 이후라 하더라도 신라의 정씨 부족이 진지촌 지백호를 원뿌리로 여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경주정씨의 시조인 문정공 정진후 영정.
정씨의 주요 본관별 연혁과 인물

고려 태조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 호족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쓰고, 토성을 부여했다. 즉 전국에 지적부를 만든 후 그 지역의 유력 호족에 지역과 성을 부여했다. ○○지역 ○○라는 본관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씨 문중의 종가에 해당하는 경주정씨의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는 경주지역에서 정씨 성을 쓰고 있는 유력 호족이었는데, 태조 왕건이 토성을 부여하여 경주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정씨의 원조인 지백호의 42세 손이 된다. 고려 초기에 병부상서를 거쳐 평장사에 이르고, 이학(理學)과 문장에 밝았다고 전해진다.

경주정씨는 원래 계림·월성 등을 본으로 쓰기도 했다. 지파로는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공파(月城尉公派)·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나뉘어져 있다. 지백호의 44세손인 정보기(鄭寶奇)가 위(偉)와 교(僑) 두 아들을 두었는데, 위의 아들 정현영(鄭玄英)이 문하시중을 지내고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받아 그 자손들이 문헌공파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희계(鄭熙啓)가 양경공이라는 시호를 받아 양경공파를 이루게 되었다. 또 고려 때 부마였던 정이기가 월성공에 봉해져 월성위공파가 되었고, 평장사를 지낸 정필(鄭弼)의 자손이 평장공파를 이루게 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 전투에서 순국한 정발(鄭撥) 장군이 있다. 인구는 30여만명이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안일호장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뒤에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에서 정지원(鄭之遠)까지 3세가 확인되어, 정지원을 기세조로 하고 있다. 정지원은 보윤호장을 지냈고, 그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을, 손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야 태부경을 지냈다. 그 후손들이 동래에 자리 잡고 살게 되면서 동래를 본관으로 정했다.


동래정씨 기세조인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의 묘. 정씨문중 중에서 가장 번성한 본관이 동래정씨이다.
동래정씨는 정씨 집안 중에서 가장 큰 문벌을 형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전주이씨(22명)·안동김씨(19명)에 이어 상신 17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대제학 12명, 호당 10명, 공신 6명, 판서 20명에 문과급제자만 198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주요 인물로는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좌익·익대·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이 있으며,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를 구하는 데 힘쓴 정광필(鄭光弼),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존겸(鄭存謙),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가 있다.

영일정씨는 지백호와 도시조 정종은(鄭鍾殷)의 후손인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을 역임하고 영일현백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정했다. 영일의 옛 지명이 연일로도 불려 연일정씨라고도 하고, 이들이 살고 있는 본 고장의 이름이 오천(烏川)이어서 오천정씨라고도 한다.

영일정씨에는 연원이 같으면서도 갈래가 다른 2파가 존재한다. 하나는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역임한 정습명을 시조로 하는 지주사공파,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가 있다. 이들은 선계가 실전되어 합보(合譜)하고 있지 못하다.


포은 정몽주 영정. 영일정씨인 정몽주는 한국 역사에서 충신
지주사공파에는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있으며, 감무공파에는 송강 정철(鄭撤)과 그의 아들로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정호(鄭澔) 형제가 있다.

진주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가 존재한다. 이를 진주8정(晉州八鄭)이라고 한다. 대체로 정예(鄭藝)·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이 주축을 이룬다. 정예는 고려 초에 광록대부 문화시랑 평장사를 역임했고, 그 후손인 정시양(鄭時陽)은 금자광록대부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했다. 정자우는 호장을 지냈고, 그의 6세손인 정신열(鄭臣烈)은 진양부원군에 봉해졌다. 8세손인 정진경(鄭晉卿)은 좌우위보승중랑장을 역임했다.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했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장은 고려 말에 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진주정씨에는 문익점의 장인이면서 목화 재배에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이 있으며, 세조와 성종 때 청백리와 명필로 유명했던 정척(鄭陟), 임진왜란 때 명장인 정기룡(鄭起龍) 등이 있다.

하동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신라 말에 하동호장을 지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는 밀직공 국룡파, 상서예부 지부사를 지낸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지부사공 손위파, 금자광록대부 도첨의좌정승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로 하는 정승공 응파가 있다.

하동정씨의 주요 인물로는 고려 충열왕 때 첨의 찬성사를 지낸 정지연(鄭芝衍), 세종 때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鄭麟趾), 성종 때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여창(鄭汝昌),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현대라는 대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도 하동정씨 문중이다.


다산 정약용 영정. 정약용은 정덕성을 시조로 하는 압해정(丁)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씨(鄭氏) 외 정씨, 정(丁)씨·정(程)씨

압해정씨(押海丁氏)

정씨(丁氏)는 본래 중국 당나라 사람인 정덕성(丁德盛)이 신라 말(문성왕 15년, 853년)에 전남 신안군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정착하면서 정씨(丁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국 쪽에서는 당나라 이전에도 정(丁)씨가 존재했으며, 후연의 4대 황제였던 모용희를 옹립할 때 태후 정(丁)씨가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다만, 정덕성이 당나라에서 승상을 역임하다, 외국이나 다를 바 없는 한반도 남해안으로 귀양을 왔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다름 아닌 정약용(丁若鏞)이 압해정씨를 연구하며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정(丁)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에는 70여본(本)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이므로 현재는 압해정씨로 합본하고 있다. 크게는 나주·영광·창원·의성 4파로 분류하고 있다.

그 중 나주정(丁)씨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정(丁)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실학의 대가 다산(茶山)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정(丁)씨는 현대에 들어와 많은 인물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일권씨, 3공에서 국방부 장관, 5공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래혁씨 등이 압해정씨이다.

정씨라서 테니스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286개 성씨 중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기에 스포츠 선수도 많고 테니스선수도 많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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