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최대 기업인 두 회사가 벌이는 건곤일척의 대결은 법적 다툼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지켜보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겨냥해 월드 미디어를 무대로 경쟁하는 여론전이기도 하다. 소송전이란 것이 길게 끌어가는 경우가 많고, 결국은 법률 전문가, 특히 미국 변호사들의 배만 불려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궁극적인 승부는 어느 쪽이 시장에서 더 많은 지구촌 소비자의 선택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법정의 승자가 시장의 패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한편 삼성-애플 소송이 거대 기업들끼리 벌이는 ‘OK목장의 결투’라면 한국의 국제 진출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사람 등 서양인들과 개인적 문제를 놓고 소소한 다툼이나 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제까지 영어를 잘하는 법이나 미국사람과 잘 지내는 법, 미국에 가서 잘 적응하는 법에 대한 안내서는 꽤 많은데 미국사람들과 무엇인가를 두고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알려주는 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지난 1980년 한 방송사의 신입PD였던 나는 광주항쟁 직후 제작거부로 해직을 당한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한동안 지난 끝에 미국으로 간 나는 87년 유월항쟁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5년 넘어 기간을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지내면서 미국의 운전면허시험장, 이민국, 대학당국, 경찰, 법원, 은행, 보험회사 등 각종 기관에 요구사항을 제기하거나 불이익처분을 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담당자들과 더러 따질 일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요령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첫째, 목소리를 높이면 진다.
한국에서 시비가 벌어지면 곧바로 큰 소리를 내고 강한 표현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개인 간의 다툼일 경우 나이를 내세우고 반말 트집으로 상대를 누르려 한다. 여기서 반말은 공대도 아니고 하대도 아닌 ‘절반 말’이고 낮춤말은 손아래 가족이나 제자, 아이들에게 하는 ‘하대 말’인데 두 가지를 혼동해서 낮춤말을 반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시비곡직을 따질 때 목소리의 톤을 높이면 그 순간부터 상대방은 고개를 돌리고 여차하면 경찰을 부를 태세에 들어가고, 주위 사람들도 정상적인 불만 표시나 항의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쪽이 지나치게 흥분했거나 궁지에 몰려서라고 여기기 때문에 대단히 불리하다. 따라서 분쟁이 있을 때 시종 냉정과 침착을 유지하고 (Keep cool!)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으로 비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둘째, 언어 문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 미국에서 따질 수 없다고 흔히 생각하는데 기실은 결정적 장애가 아니다. 법적 문제 등 중요사안과 관련해 아예 영어를 모르거나 크게 부족하다면 통역을 불러달라고 요구해야 하고 아니면 변호사나 법률 서비스기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어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 주장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근거가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특히 상대방을 설득 또는 제압할 수 있는 회심의 카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즉 상대방의 처사에서 크게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내 주장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등 결정적 ‘한 방’을 준비해야 한다. 이쪽 주장이 너무 길거나 복잡해서 말로 하기 힘들면 미리 편지나 메모 등 서면으로 정리해서 제시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셋째, 이길 만한 일을 갖고 싸워라.
80년대 초 미국에 간 지 일주일 만에 치른 운전면허시험에서 운전이 서툴러 불합격됐지만 시험장장에게 따진 끝에 그날 운전면허증을 따낸 이래 각종 기관, 회사에 찾아가 이쪽 요구를 관철한 일이 열 번 쯤 됐다. 청나라 건륭제가 원정 10번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고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일컬은 것을 따서 ‘10전10승’이라고 농담한 적이 있었다. 미국 사람들에게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무슨 비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이길 만한 일을 골라 근거를 갖고 차분하게 따진 덕분이었다. 애시 당초 말이 안 되는 사안을 갖고 고집을 부려봐야 어디서나 통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간혹 목소리 큰 사람의 억지가 통하기도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특히 미국은 이런 면에서 비교적 투명하고 일면, 상대적으로 논리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다. 넷째, 법과 규정, 책임을 잘 알아야 한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사회(Rule of Law)이고 책임(Accountability)을 중시한다. 미국은 원래는 앵글로색슨 국가여서 영국의 복사확대판이란 뿌리를 갖고 있지만 이민으로 이뤄진 다원사회이다 보니 문화, 도덕보다는 성문법으로 모든 것을 규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인종, 민족, 종교, 관습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법률 외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권위나 규범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분쟁은 법정의 판결이나 공공기관의 법규 해석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법과 규칙, 규정, 규제를 잘 알아야만 효과적인 대처를 할 수 있다. 또한 이쪽의 요구를 일선 담당자가 거부할 때,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과 이유를 서면으로 확인하고 서명해 달라고 요구하면 한 발 물러서는 경우가 왕왕 있다. 법원에 고소당하거나 내부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Accountability는 말 그대로 해명, 또는 설명을 할 책임이라는 뜻이다.
다섯째, 멈출 줄 아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실익이 없는 소송이나 분쟁은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사회정의, 명예, 체면, 감정적 만족 등도 중요한 이유나 명분이 될 수 있겠지만 실익이 없는 경우 다른 방도로 보상을 찾는 것이 낫다. 따질 만한 일이라 해도 일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결과가 그 범위 안에 들어오면 거기서 멈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현실적 실용주의와 비용 대 효용의 비교, 거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 등이 미국적 태도라 할진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끝내 거부하면 처음부터 미국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