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 바브링카는 별명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타니멀(Stanimal:Stan+animal)이고 또 한 가지가 '스탄 더 맨(Stan the man)'이다. 전자는 바브링카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끈기가 마치 짐승같다 하여 붙인 별명이요, 후자는 말 그대로 '끝내주는' 테니스를 치는 바브링카의 신들린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바브링카와 조코비치의 US오픈 결승전은 그의 별칭이 가진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승부 가운데 하나였다.
바브링카는 테니스 팬들이 흔히 얘기하는 '스탄 더 맨' 모드로 조코비치를 정신없이 두들겨 팼다. 포핸드와 백핸드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는 강타를 때리며 수비 달인 조코비치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더 힘을 낸 바브링카는 말 그대로 짐승같았다. 2015년 프랑스오픈에서 조코비치의 커리어 그랜드슬램 꿈을 산산조각내 버렸던 그 때처럼 말이다.
세계 1위 조코비치와 바브링카의 대결을 앞두고 몇몇 해외 테니스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바브링카의 우세를 점치기도 했다. 페더러도, 나달도, 머레이도 해내지 못한 대업을 바브링카가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경기 결과에 그대로 나타났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바브링카의 테니스야말로 무결점의 조코비치를 흠집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약점이 없는 조코비치의 천적이 바로 '스탄 더 맨'이다.
조코비치는 누구나 인정하는 그라운드 스트로크의 대가다. 조코비치의 포핸드와 백핸드는 공격적이면서 동시에 안정적이라는 보기 드문 장점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최전성기 나달이 아니고서는 조코비치와의 베이스라인 대결에서 맞설 수가 없다. 페더러가 일찌감치 조코비치의 스트로크 실력을 인정해 네트 플레이와 서브 게임 위주로 전략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조코비치의 놀라운 유연성에서 나오는 빈틈없는 수비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바브링카만은 '철벽' 조코비치의 디펜스를 뚫을 수 있는 가공할 무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대 테니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샷으로 꼽히는 바브링카의 전매특허, 원핸드 백핸드이다.
바브링카의 원핸드 백핸드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명품샷이다.
바브링카는 조코비치가 톱랭커들을 무너뜨릴 때 집요하게 구사하는 백핸드vs백핸드 대결에서 지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다. 조코비치는 테니스 사상 최고로 꼽히는 견고한 투핸드 백핸드를 바탕으로 상대의 백핸드를 집중 공략한다. 하지만 바브링카의 강력한 백핸드 드라이브는 조코비치의 백핸드 공격을 훨씬 강하게 맞받아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조코비치 입장에선 '할 게 없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 늘 상대의 백핸드를 날카롭게 공략한 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조코비치의 공격 패턴이 실종되는 상황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테니스닷컴의 칼럼니스트 스티브 티그노어는 바브링카의 강력한 그라운드 스트로크 능력이야 말로 조코비치를 꺾을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조코비치는 세계랭킹 1위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꾸준하고 안정성 있는 기량을 갖고 있었지만, 바브링카의 파워와 속도, 샷의 무게가 한 수 위였다. 조코비치가 강한 샷을 날리면 그때마다 바브링카는 더 강하게 맞받아칠 수 있었다.
While Djokovic is the No. 1 player, and the one with the more consistent all-around game, it’s Wawrinka who has the edge in power, pace and weight of shot. Any ball that Djokovic hits hard, Wawrinka can hit back harder.
바브링카와 조코비치의 라이벌 구도가 시작된 2013년 이후 어떤 맞대결을 찾아봐도, 모든 그라운드 스트로크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바브링카가 갖고 있었다. 승패를 떠나서 말이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조코비치가 베이스라인 랠리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경우는 빅4를 상대할 때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유독, 바브링카에게만은 철저하게 스트로크 대결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바브링카의 샷 메이킹은 지금 현역 선수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코비치 역시 바브링카의 이 공격 본능을 상당히 경계하는 동시에 의식하고 있음은 결승전이 끝난 직후 인터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브링카의 공은 굉장히 무겁습니다. 특히 백핸드 코너에서 때리는 공은요. 포핸드는 회전이 없는 강타로 굉장히 공격적인 샷을 구사합니다.
백핸드는 아시다시피 슬라이스와 깎아치는 기술에도 능하죠. 특히 수비할 때 슬라이스를 구사한 뒤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백핸드 크로스샷으로 상대방을 코트 밖으로 내몰아 버립니다.
아마도 바브링카의 그 샷은 현재 세계 최고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강인하고 오래 버틸 수 있는 능력까지 있는 선수입니다.
he hits a very heavy ball, especially from the backhand corner. Forehand is very flat. You know, he goes for his shots from the forehand side. Backhand, you know, great chip, great slice. He uses that when he's defending and then he comes up, you know, and can get you off the court with a backhand crosscourt.
That's probably one of his best shots in the game. Physically he's very strong, so he can endure a lot.
물론 바브링카-조코비치의 대결을 이 구도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바브링카가 조코비치를 이길 수 있는 경우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무한 공격이 어디까지나 실수없이 통할 때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랜드슬램이 아닌 대부분의 마스터스 시리즈에서 바브링카는 조코비치에게 힘을 쓰지 못했다. 왜일까? 여기에 바브링카가 US오픈 결승에서 조코비치를 꺾을 수 있는 두 번째 비밀이 있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가 나올까? 바로 5세트와 3세트 경기의 시스템적 차이 때문이다. 바브링카의 '공격 앞으로!'전법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높다. Unforced error, 범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바브링카는 5세트라는 긴 시간이 주어지는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초반 실수를 만회하고 경기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다. 반면에 3세트 경기에서는 컨디션을 찾을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허무하게 조코비치에게 패배를 헌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바브링카는 '슬로우 스타터'의 전형적인 예다. 한 경기 뿐 아니라 토너먼트 대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반 이후부터 몸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특히 8강 이후부터는 어느 누구와 붙어도 이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변신한다.
바브링카의 놀라운 기록이 한 가지 있는데, 2014년 이후 그랜드슬램을 비롯한 투어 대회 결승전 승률이 100%라는 점이다. 11번 결승에 올라 모두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그만큼 강심장인 동시에, 결승까지 오면서 자신의 기량을 최정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대회 바브링카는 어느 누구보다 힘든 과정을 거쳤다. 1회전부터 결승까지 7번의 승리 가운데 순탄한 승부가 거의 없었다. 특히 3회전 에반스와 경기에서는 매치 포인트까지 몰렸다. 델 포트로와의 8강, 니시코리와의 준결승전 역시 말 그대로 피지컬(Physical)한 경기의 전형을 보여주며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과정 속에서 바브링카는 자신의 샷을 최절정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고, 결승전에서 조코비치라는 거함을 침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브링카의 '브레인 세리머니'도 이번 US오픈 최고 히트상품이 됐다.
반면 조코비치는 결승에 앞서 이번 대회 제대로 치른 경기가 딱 두 경기 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했고 3회전 미카일 유즈니전은 기권승, 8강 송가와의 경기도 두 세트만 치르고 상대 기권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준결승전에서조차 가엘 몽피스의 변칙 작전을 만나야 했고 보통의 8강전같은 타이트한 경기를 치러보지 못한 채 결승에 올라야 했다. 요컨데 조코비치는 바브링카라는 강적을 만나기 전에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승부를 겨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체력적, 정신적, 기량적으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절정의 컨디션을 보이는 바브링카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대회 시작 전부터 손목과 어깨 부상에 시달린 점을 감안하면, 결승에 오른 자체가 조코비치의 강인함을 드러내주는 대목이었다. 테니스 선수로는 황혼기인 31살의 나이에 생애 첫 US오픈 우승을 차지한 바브링카는 현역으로는 앤디 머레이와 함께 통산 3번의 그랜드슬램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가 됐다. 꾸준함은 떨어지지만 한번 폭발하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바브링카의 존재는 이른바 빅4 시대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바브링카가 과연 얼마나 더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 머레이보다 더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린다면 지금의 빅4시대를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지 참으로 궁금해지기도 한다. 또 한 가지. 2년 연속 메이저대회 3회 우승이라는 페더러의 대기록을 넘봤던 조코비치의 좌절이 일시적일 것인가, 아니면 쇠퇴의 시작인가를 놓고 다시 테니스 호사가들의 갑론을박이 시작될 것이다. 조코비치는 지난 2년간 엄청난 승리를 거뒀고, 그로 인한 몸의 혹사는 이번 US오픈과 지난 리우올림픽, 윔블던을 통해 여실히 증명됐다. 조코비치의 메이저 우승 횟수는 12회. 나달 샘프러스(14회)를 넘어 페더러(17회)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흥미로울 2017 남자 테니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