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이기백 교수와 김성재 대표

얼마 전 제50집으로 종간(終刊)한 '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가 처음 발간된 것은 1987년 8월이었다. 학계의 연구 성과를 되도록 많은 시민에게 전달하는 가교(架橋) 역할을 자임한 이 반년간지(半年刊誌)는 그로부터 꼬박 25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간행되면서 대표적인 역사 교양 잡지로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1만부 이상 팔려나가기도 했던 '한국사 시민강좌'는 그런 열기를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넓고 균형 잡힌 시각과 엄격한 학문성, 대중적인 서술로 주목받았다.

숱한 잡지가 명멸하는 우리 출판계에서 상업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교양 잡지가 사반세기나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잡지를 주도한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1924~ 2004)의 의지와 열성 때문이었다. 광복 후 교육받은 1세대 역사학자의 대표격인 그는 연구 못지않게 그 결과를 시민과 공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1960~70년대에 식민지를 거치며 뿌리 뽑힌 우리 국민의 역사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주옥같은 사론(史論)들을 썼고, 1980년대 들어 민족과 민중을 둘러싸고 역사관의 혼란이 빚어지자 '한국사 시민강좌'를 만들었다. 그는 원고료와 간행비 등 일체의 비용을 사재(私財)로 충당했으며, 기획과 편집을 책임졌다. 그는 만년에 간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병구(病軀)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편집회의를 주재했다. 이 교수가 35집까지 내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편집위원으로 그를 도왔던 유영익(연세대) 민현구(고려대) 이기동(동국대) 이태진(서울대) 교수 등 후배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7년 반 더 '한국사 시민강좌'를 간행했다.

한국학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또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인물은 계간 학술지 '한국학보'를 30년 동안 발간했던 김성재 일지사 대표(1927~2005)다. 대학(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출판계에 투신한 그는 1956년 일지사를 설립한 후 인문학 서적 출판의 외길을 걸었고, 1975년 겨울 '식민사관 극복'이란 큰 뜻을 품고 한국학보를 창간했다. "두세 번 내다 말 걸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김원용 서울대 교수의 만류를 무릅쓰고 시작한 한국학보 간행은 결국 그의 '필생(畢生)의 업(業)'이 됐다. 김윤식(국문학) 신용하(사회학) 한영우(한국사) 등 김 대표보다 열살 정도 아래인 쟁쟁한 학자들이 그의 뜻에 동참하여 편집위원을 맡았다. 원고 청탁에서 교정까지 한국학보의 모든 출판 과정을 꼼꼼히 챙긴 김 대표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별세 일주일 전까지 직접 한국학보의 교정을 보았다. '한국학의 거점'으로 불린 한국학보는 매번 적자를 보면서도 그가 세상을 떠난 4개월 뒤 그의 뜻대로 120호를 채우고 종간 됐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한국사 시민강좌' '한국학보'처럼 우리 문화사의 한 장(章)을 차지할 학술·교양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학계와 출판계의 규모는 그동안 엄청나게 커지고, 모든 여건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는데도 상황이 거꾸로 간 것은 이기백과 김성재 같은 헌신적인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논문 쓰는 기계가 된 학자들, 매출과 수익을 올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출판인들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역사에 남을 잡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아직 밝은 눈을 잃지 않은 학자와 출판인들에게 학술 잡지를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 구실'을 하려고 했던 그들의 위대한 선배, 이기백과 김성재를 기억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조선일보 이선민 오피니언부장 sm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