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중국 시안을 방문해 병마총의 설명을 듣고 있다

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길에 다녀오면서 시안(西安)이란 도시가 새삼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시안은 우리 귀에 익은 ‘천하장안’에 나오는 장안(長安)의 오늘날 이름이다.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 뤄양(洛陽)과 함께 중국 4대 고도(古都)로 알려진 시안은 3,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서주(西周) 문왕과 무왕 시절 풍호(?鎬)란 이름의 쌍둥이도시 수도였고,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은 현재 시안 교외에 있었다. 수도(首都)의 대명사이기도 한 장안은 한나라와 당나라 때 이름인데 수나라는 대경(大慶)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보통 중국사를 통틀어 길고 짧은 13개 왕조가 시안을 수도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西周·秦·西漢·新·東漢·西晉·前趙·前秦·後秦·西魏·北周·隋·唐)

한때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장안은 당나라가 망할 때 주민들이 강제 이주 당하면서 소도시로 전락했고, 명나라 때는 서안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명·청 시대에도 시안은 중국 서북의 요충이었고 관중평원의 중심이었다. 지금 시안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명나라 때 당나라 황궁의 크기로 건설한 것으로 한나라 때 도성의 3분의1, 수나라 때의 7분의 1 면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시안을 바빌론, 아테네, 로마와 함께 세계 4대 문명고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 중국 지도

중국 지도를 보면 서북쪽 상당한 외진 곳에 위치한 시안이 고대에는 어째서 수도 노릇을 그토록 오래 했을까.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려운 의문이지만 굳이 말한다면, 관중평원의 지리·지형적 이점과 서북 변경인들의 강건한 심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대 중국에서 천하를 제패할 군사력을 뒷받침할 농토지대를 보유한 지역은 황하 중류의 중원(위·정나라)과 황하 삼각주(제나라), 황하의 지류인 위수를 둘러싼 관중평원(진나라) 정도에 불과했다. 장강 중류(초나라)와 삼각주(오·월나라)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곳으로 혹서와 습기, 풍토병 때문에 당시 중원에서 장강 골짜기로 귀양을 가면 1년 안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진나라는 2천리가 넘는 관중평원에 일찌감치 관개수로망을 완성해 농업생산력의 기반을 갖췄다. 또 험준한 진령산맥에 둘러싸여 방어가 손쉬웠고, 서쪽에 치우쳐 있는 위치조건이 오히려 협공을 당할 우려 없이 중원에 대한 공격을 가하기에 유리했다.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 놓았다. 또 진나라가 미개척 곡창지대인 파촉(사천) 땅을 배후지로 선점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서북 변경에서 건조한 기후를 견디며 유목민들과 싸워온 진나라 백성들의 야성과 연대감도 큰 역할을 했다. 14세기 이슬람 역사가 이븐 칼둔이 말하듯, 베두인 유목민은 문명화된 도시민보다 용감하고 부족의 연대감(아싸비야)을 유지하는 한 정복 능력이 크다. 몽골족이 중국인을 정복한 것이나 마케도니아인이 아테네인을 굴복시킨 것이 그런 예다. 문제는 야만민족이 사치와 안락에 빠지게 되면 정복 기간이 길지 못하다는 데 있다.

진나라는 망했지만 장안은 8백년 이상 중국의 수도로 군림했다. 황하 유역이 아직은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갖 인재와 물산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이것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이 수 양제가 주도한 대운하였다. 후에는 북경과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로 바뀌었지만, 수·당 시대에는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 남부를 아우르는 ‘강남’으로부터 개봉까지 갔다가 다시 황하를 거슬러 올라 장안으로 세곡을 옮기는 코스였다.

명·청 시대에는 강남지역이 중국 국가세수의 3분의 2를 담당하고, 과거 급제자도 비슷한 비율로 배출하게 된다. 다른 지역은 세금을 걷어 현지 비용을 충당하기에 급급했고, 외곽의 변경지역은 거꾸로 엄청난 군사비용 때문에 막대한 양곡을 보내줘야 했는데 수송비로 태반이 길에서 없어지고는 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황하와 장강, 그리고 두 강을 잇는 대운하가 대동맥의 역할을 한 덕분에 하나의 온전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안은 동쪽으로 황하와 대운하로 이어지는 수로의 종점이었지만 동시에 서쪽으로는 실크로드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근자에 실크로드가 신라의 서라벌(경주)까지 이어졌다거나 일본까지 연결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동서 간에 육상 및 해상 교역이 활발했었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 교역은 일단의 상인대가 전체 코스를 종주한 것이 아니라 구간 별로 바통을 주고받는 중계 무역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안이 목적지였다는 기존의 관점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시안은 송나라가 변경(개봉)에 도읍한 이래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근래에 와서 ‘중국에서 가장 쇠락한 도시’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10대 도시에 끼었던 것이 개혁개방 이후 도시 GDP가 전국 40위 밖으로 쳐졌기 때문이다. 1인당 GDP로 따지면 신장위그르족자치구의 우르무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통계가 나와 시안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시안은 그런 하락세의 반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내륙에 위치한다는 군사상 이점으로 우주항공산업이 집중 배치돼 있지만 군수산업의 특성상 고용과 매출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섬서성 정부는 시안이 중국 3대 교육 도시의 하나로 인력이 풍부한 점을 활용해 IT산업, 특히 소프트웨어 쪽으로 특화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삼성이 이 지역에 거액을 투자해 중국내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발전전략에 기여하고 있다. 시안은 청두(成都), 충칭(重慶)과 더불어 중국정부의 ‘서부 대개발’정책에서 3대 거점의 하나라는 점에서 앞으로 비약적 발전이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시안에 여러 차례 갔는데 가족·친구와의 패키지투어거나 개인적인 역사기행, 또는 여행 기착지가 고작이었다. 따라서 시안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 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시안에 간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몇몇 곳이나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은 일러 드릴 수 있을 듯하다. 먼저 꼭 가 볼 곳.

시안에서 한 가지만 꼽는다면 아무래도 ‘병마용’이 아닐까 싶다. 병마용의 용(俑)은 나무를 깎아 사람 형상으로 만든 인형(木偶)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진흙을 구어 만든 토용을 가리킨다.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 불리는 병마용은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첫 출토가 이뤄졌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 농부는 병마용 박물관에 나와서 관람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는 했다. 군인과 전마, 전차를 실물 크기로 만들었는데 수천 명 병사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6척 장신의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병마용 부근에는 진시황의 능묘가 있는데 그냥 피라미드 모양의 조그만 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가운데 꼭대기까지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는데 주변의 평범한 풍경 외에는 볼 것이 없다. 병마용을 발굴할 때 수 천 년 동안 밀폐돼 있던 토용들이 외기를 접하자 순식간에 화려한 채색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때문에 이런 퇴색현상이나 다른 훼손을 막기에 충분한 기술이 확보될 때까지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않기로 했다. 당연한 결정이다. 하지만 내 생전에는 진시황릉 내부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유감이다.

가까운 곳에 한국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화청지가 있다. 화청지는 온천이자 별궁인데 당 명황(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1936년 장개석이 동북군벌 장학량에게 체포당한 시안사건의 현장으로 더 뜻 깊었다. 아버지 장작림을 일본에 잃은 장학량은 공산당 토벌작전 독려차 온 장개석을 감금한 뒤 국공내전을 멈추고 항일전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화청지 뒷산 중턱에 한밤중에 기습을 당한 장개석이 급히 몸을 숨겼다가 붙들린 곳이 있었지만 실제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시안의 성벽은 베이징 주변 만리장성이 명나라 말기 ‘기효신서’의 저자 척계광에 의해 중건됐듯이 명대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중국도 한국처럼 시안과 난징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성벽이 제대로 남아있는 곳이 없다. 따라서 시안에 가면 성벽에 한번 올라가 볼 만 하다. 종루와 고루는 베이징에도 있으니 신기할 것은 없지만 시안의 것은 규모도 크고 지금도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대안탑과 소안탑은 서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지만 시안의 진정한 명물들이라 할 만 하다. 서유기의 모델인 현장법사가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는 곳이자 한문으로의 번역 작업장이기도 했던 대안탑은 지금 보아도 당당하기만 하다. 약 3천개의 비석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비림’ 박물관에서는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워서 낯익은 ‘대진경교중국유행비’ 등을 볼 수 있다.

시안에서 한참 떨어져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돼 있는 건릉에는 그 유명한 무자비(無字碑)와 영태공주묘의 벽화 등이 있는데 시간과 비용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비롯해 수많은 보물이 쏟아져 나온 법문사도 시안에서 120㎞나 떨어져 있어 가보지 못했다. 중국 5악의 하나로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화산에는 산 입구에 가서 하룻밤을 잤는데 시간이 모자란 바람에 오르지 못했다. 시안에 다시 갈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씩 들르고 싶은 곳들이다.

시안에서 가볼 곳도 많지만 나는 뤄양에서 기차를 타고 싼먼샤(三門峽)을 지나 시안으로 가는 길에 감회가 깊었다. 함곡관을 따로 찾아가 보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 읽은 역사책에 하도 자주 나오던 곳들이라 정겹기만 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바오지(?鷄)를 거쳐 란저우(蘭州)로 가는 좁다란 기찻길은 위청과 곽거병의 흉노 원정을 되살리며 꼭 한번 가볼 만 하다. 삼국지를 좋아한다면 검문관 등 사천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길이 필수 답사코스다.

시안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체험으로는 중국인 무슬림인 회족 사람에게 말 걸어 보기가 있을 것 같다. 서양인의 얼굴과 골격을 가진 위그르인들과는 달리 회족은 한족과 외모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으로 중구에 들어온 아랍인의 후예라지만 중국인과의 혼혈 때문에 겉으로는 구별이 거의 힘들다. 19세기 후반 3천만 명에 이르렀던 회족은 수차례의 반란과 전쟁을 겪으면서 학살되거나 추방, 개종했고 지금은 약 1천만 명의 회족이 전 중국에 퍼져 살고 있지만 서북부와 중원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베이징에서도 회족은 찾아볼 수 있지만 시안에는 상당한 규모의 이슬람 거주구역이 있다.

회족을 만나면 중국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눠 볼 수 있고 두 언어에 능숙하지 않을 경우 한문 필담이나 바디 랭귀지도 시도해 볼 수 있다. 어느 사회에나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들과 말을 나누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나와 종교가 다르다 해서 생각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느끼는 것도 깨달음이고, “나와는 이런 점이 판이하게 다르네”라고 생각해도 배움이 될 수 있다. 여행은 원래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더러 ‘사람 사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 같다. 이병효(코멘터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