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테니스를 대표하는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는 동네 테니스클럽 코치인 보리스 브레스크바에 의해 발탁되어 키워졌다. 바덴 테니스클럽 소속인 브레스크바 코치는 베커와 그라프의 그랜드슬램 우승자의 잠재력을 보고 클럽의 후원을 받아 세계적인 선수로 키웠다. 사진에 베커와 그라프, 코치 브레스크바가 표시되어 있다

80년, 90년대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가 건재하던 시절의 독일 테니스는 천하를 호령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여자는 동구권의 여러 나라로부터 쏟아져 나온 꿈꾸는 신데렐라들에게, 남자는 스포츠 강국 미국에게 패권을 넘겨 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남자의 경우 비록 Top 10 명단에 이름을 올린 독일 선수는 하나도 없다. Top 100에 6명, 200위 안에 프랑스(20명)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19명의 선수들이 들어 있다. 화려한 스타는 없지만 언제든지 치고 올라 올 수 있는 선수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독일은 흔히 세계 최고의 사회체육국가로 알려져 있다. 테니스는 어떨까. 파워하우스로 부를 수 있을지 그 저변을 살펴보자.

테니스 인프라(tennis infra-structure)
유럽에서 가장 많은 8천 1백만 명의 인구에 약 4만 9천여 면의 코트가 있다. 전체 동호인 약 2백4십만 명 중 약 2백만 명 정도가 1만 개가 넘는 클럽에 선수로 등록 되어 각종 지역리그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독일 테니스의 풀 뿌리(grassroots)를 구성하고 있고, 5개의 투어대회(ATP 4, WTA 1)가 열린다. 비 정기적으로 가끔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을 포함하면 전체 동호인 수는 약 520만 명에 달한다.

클럽 테니스(club tennis)
독일에는 10만개가 넘는 스포츠 클럽이 있고, 그 중 테니스 클럽만 해도 1만개가 넘는다. 독일에서 테니스의 인기는 체조와 축구 다음으로 세 번째다. 8천 1백만 명의 인구 중 약 3분의 1이 각종 스포츠클럽에 가입하여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있고, 사설스포츠센터나 비공식클럽에서 개인적으로 즐기는 사람까지 합치면 독일국민의 사회체육 참여비율은 70%가 넘는다. 이렇게 참여비율이 높은 이유는, 독일의 스포츠클럽은 공익목적의 개방성이 보장된 비영리단체의 지위를 인정받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45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에 의해서 운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성이 좋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스포츠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 독일 테니스의 뿌리는 바로 1만개가 넘는 테니스 클럽이다. 여기에서 어릴 때부터 테니스를 즐기며 빠져들게 되고, 유럽 곳곳에서 거의 매주 벌어지는 주니어 토너먼트에서 기량과 경험을 쌓아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 독일의 테니스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영욕(glory and shame)의 세월
1985년 보리스 베커가 윔블던(Wimbledon)에서 역대 최연소인 17세의 나이로 우승했을 때 독일 전역은 환호로 뒤덮였고, 이어 1988년 슈테피 그라프가 19세의 나이로 커리어 골든슬램(Career Golden Slam)을 달성했을 때 독일은 세계 테니스의 정점에 있었다. 이후 1991년 미카엘 슈티흐의 윔블던 우승을 끝으로 독일의 테니스는 정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후에도 독일국민들은 과거 베커나 그라프가 형성한 황금시대(golden era)를 재현할 선수가 나오리란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길어지는 슬럼프에 그 기대는 점점 옅어져 갔다. 현재 ATP 무대에서는 Top 30 명단에 토미 하스(14위/35세), 콜 슈라이버(21위/29세), 플로리앙 마이어(30위/29세) 등 3명의 이름이 올라 있으나 모두들 노쇠하여 더 이상의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WTA 에서도 5명의 여자선수들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힘이 부쳐 보인다. 스타선수가 없으니 후원사들은 떨어져 나가고 TV노출도 현저히 줄어들고, 2004년에는 베를린에서 열리던 WTA 투어대회를 카타르에 팔았고, 함부르크 오픈도 마스터즈 시리즈에서 500시리즈로 격하되는 등 전체적으로 침체일로에 빠졌다. 독일에서 축구, 체조 다음으로 큰 경기단체이자 190만 명이 넘는 선수가 등록되어 있는 독일 테니스협회(DTB)는 강력한 주니어 육성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과거 영화 재현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분데스리가(Bundesliga)
독일에는 미국의 WTT(World Team Tennis)와 같은 프로테니스 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선수 개개인과 연간단위로 계약을 하고 연봉을 받는 우리나라의 실업팀과 비슷한 구조인데, 남자 10팀, 여자 7팀으로 구성되어 5월부터 리그경기를 벌이고, 각 팀 별로 기업의 후원도 받고, TV 중계도 이루어진다. 유럽에는 이런 프로리그가 여러 개 있는데, 독일의 분데리스리가(Bundesliga)는 프랑스의 프렌치 리그(French League), 이탈리아의 세리에 A(Seria A)와 함께 가장 활성화 되어있고 대우도 좋은 리그에 속한다. 프랑스 리그에는 가엘 몽피스나 리샤르 가스케, 조 윌프리드 송가 같은 유명 선수들도 투어중간에 틈틈이 뛰고 있지만 대부분 Top 100~300위권의 선수들이 주로 활동한다. 보수는 Top 30 선수의 경우 경기당 약 1천 8백만 원, Top 100 선수는 약 9백만 원 정도이고, Top 100~300은 약 370만 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니, 웬만한 ATP 투어대회의 상금 못지 않다. 그래서 어떤 선수는 ATP 투어대회에 참가하는 대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등의 프로팀과 계약을 하고 연간 약 1억 2천~1억 5천만 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ATP 투어처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고, 랭킹 포인트 유지에 급급할 필요도 없고, 승패에 관계없이 월급이 지급되니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적용

우리도 국민생활체육전국테니스협회의 232개 시군구연합회가 비영리단체로 등록되어 정부의 테니스 코트 인프라 운영에 참가한 뒤 어린이교실과 주말로컬대회를 운영하면 어떨까? 주니어들이 취미로 테니스를 하게 되고 그 가운데 투어 선수로 방향을 잡는 주니어들이 나오게 된다. 우리도 독일처럼 각 클럽에 코치를 두고 주니어를 키워내면 지금보다 더 재미있는 테니스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