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가 어린 마음에 각인된 탓이었으리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1970년대 우리 세대의 영웅이었고 쿠바혁명은 이상주의의 상징이었다.

오래 벼른 끝에 쿠바에 간 것은 2006년3월이었다. 언론계 선배 두 분과 후배 한 사람까지 모두 4명이 일행이었는데 내가 여행계획을 짰다. 워낙 먼 곳이라 비용, 특히 항공료가 가장 큰 고려사항이었다. 13박14일 일정이었는데 오가는 길에 일본, 미국, 멕시코를 들러야 했기 때문에 쿠바에 머문 것은 겨우 닷새뿐이었다. 일본과 미국은 항공료를 줄이기 위한 경유지였지만 멕시코는 일부러 선택한 제2의 목적지였다.
한국에서 쿠바를 가려면 캐나다와 멕시코 가운데 한 나라를 거쳐 가야 한다. 미국은 쿠바 직항편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쿠바 입출국을 금지하고 있다. 캐나다야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멕시코를 거치기로 했다. 쿠바 현지에 가보니 캐나다에서 비행편이 많고 환율도 미국 달러보다 유리해서 다음엔 캐나다를 통해 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로 가면 멕시코시티를 거치는데 이왕이면 돌아오는 길에는 유카탄 반도의 칸쿤을 들르기로 했다. 칸쿤에서 3시간 거리인 치첸 이차의 마야 피라미드는 또 하나의 유혹이었다. 멕시코시티행 항공편을 찾아보니 당시엔 유류할증료가 없었는데도 150만원이 넘는 고가였다. 연구 끝에 로스앤젤리스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서울에서 LA까지 가장 싼 항공사가 일본항공, 왕복 59만원(세금 포함 81만원)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의 연결시간 5시간 반을 이용해서 근처 사쿠라 시에 있는 국립일본역사박물관을 다녀오니 딱 맞았다. LA에서 렌트카로 샌디에이고에 들어가 코로나도섬을 일주한 다음 동물원에 들렀다. 샌디에이고는 씨월드와 동물원이 유명한데 동물원 쪽이 실속이 있을 것 같았다. 호텔에 하루 머물고 이튿날 아침엔 고교 동창의 차를 얻어 타고 티후아나 공항으로 갔다. 티후아나→멕시코시티→아바나→칸쿤→LA 항공편은 멕시카나항공을 이용했는데 요금이 총86만원(세금 포함)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소칼로 광장과 시내 투어 외에 교외의 테오티후아칸 피라미드와 과달루페 성당을 갔다.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부부가 살던 블루 하우스(La Casa Azul)와 부근에 있는 트로츠키 암살의 현장을 찾아갈 수 있었지만 국립인류학박물관에 갈 시간이 없어 유감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2시간 반의 비행 끝에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했다. 사전에 인터넷을 뒤진 끝에 렌트카를 예약해 놨는데 실제 가보니 차가 없었다. 쿠바 전국에 몇 대 안 되는 렌트카가 공항에만 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을 꼬박 기다려 차를 운전해서 아바나 시내로 들어갔다. 쿠바의 민박은 ‘카사 파르티큘라르(Casa Particula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개인 집의 방을 여행객에게 내주는 형태였다.
아바나의 총독궁과 대성당 등 올드타운과 말레콘 해변 제방도로, 엘 모로 요새, 혁명박물관과 기념탑 등 명소를 두루 가봤다. 아바나 대학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나라에 처음 가면 시장과 대학에 가보고 시내버스를 타본다. 시장에 가면 그 도시의 활기, 대학은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 버스는 서민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다. 대부II의 무대가 됐던 호텔 나시오날과 나이트클럽, 재즈클럽도 들러봤지만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자리는 보존이 돼있지 않았다. 유명한 트로피카나 쇼는 각자 부담으로 가봤는데 70달러라는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마침 제1회 WBC 야구대회 예선전이 열리고 있는 중이라 야구 애기를 많이 나눴다. 정치 이야기를 슬그머니 건네 보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정권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기억에 남는 것은 “늙은 개가 죽어야 개벼룩이 없어진다”는 말이었다. 늙은 개는 물론 피델 카스트로를 말하고 개벼룩은 정권에 붙어먹는 권력층을 말한다.
쿠바 사람들이 참 안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료와 교육만은 잘 돼있다는 나라인데 소비수준이 너무 떨어지고 꽤 많은 여자들이 외국 관광객들한테 웃음을 팔고 있었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젊은 남자들은 독일 등지에서 온 할머니 관광객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아바나 교외로 나가니 뙤약볕 아래 수십명씩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길가에 서 있었다. 도시 간을 잇는 대중교통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경제 봉쇄를 탓하지만 집권층의 책임도 눈감을 수는 없었다.

원래는 ‘쿠바의 해운대’라 할 바라데로와 체 게바라의 묘지가 있는 산타클라라를 가려고 했지만 산타클라라 대신 ‘쿠바의 설악산’ 비냘레스를 가기로 계획을 바꿨다. 바라데로는 아바나 동쪽 140㎞에 있는 해변 휴양지로 일반 쿠바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가장 입지가 좋은 곳에 미국 부호 듀퐁 맨션이 있는데 호텔 숙박료는 너무 비싸서 레스토랑만 이용하기로 했다. 와인까지 곁들인 오찬은 맛이 훌륭했고 값도 쌌다.
선배님 한분이 와인 탓에 기분이 좋은 나머지 운전대를 자청해 잡았는데 하마터면 만리원행 끝에 황천길로 갈 뻔도 했다. 쿠바에도 고속도로가 있는데 통행차량이 드물어서 앞뒤를 비워준 ‘대통령 운전’이라고 농을 했는데 언덕길에서 큰 트럭이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바라데로에서 비냘레스로 직행했는데 비냘레스의 길가 나무가 하도 멋이 있어서 차에서 내려 바라보기도 했다. 마을에 들어가니 한국 사람은 처음 왔다고 말해준다. 그때까지는 한국 관광객들이 투어버스를 타고 김일성대 유학생 출신 쿠바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아바나 주변만 다녔기 때문이다.

칸쿤의 해변도 아름다웠지만 치첸 이차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갔던 이름 모를 소읍의 타운 광장이 기억에 남아있다. 마야 달력을 돌로 만들었다는 쿠쿨칸 피라미드 계단의 뱀 이야기도 신기했지만 나는 80년대 봤던 영화 ‘Against All Odds’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귀국 길엔 LA공항과 나리타공항 주변에서 1박씩을 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돌아왔다. 뭔가 뒤에 남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돌아와 정산을 해보니 항공료 총액이 일인당 167만원, 숙식 등 기타 비용이 105만원 등 모두 272만원이 들었다. 각자 300만원씩 미리 걷은 여행비 가운데 28만원씩을 환급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