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환율전쟁’속에 원화값이 치솟고 있다.

올 들어 원화강세가 지속되면서 원·달러 환율이 1,060원대로 내려가고 일부에서는 연내 1,000원선 붕괴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민간연구소들은 대부분 연평균 1,050원을 전망치로 제시하고 있지만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메릴린치 등 해외기관들은 1,000원대로 예측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원화값이 올라가고 환율이 떨어지는 주된 이유는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주요선진국들이 각각 자국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경기를 부양하려는 ‘양적 금융완화(Quantitative Easing)’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재정위기 이후 종래의 통화정책수단이 거의 고갈된 상태에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쉽게 말해 “돈을 찍어 뿌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미국은 현재 매달 850억 규모의 세 번째 양적 완화(QE3)를 시행중인데 일본도 ‘무제한 양적 완화’를 내세운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엔화값이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앞 다투어 돈을 푸는 바람에 환율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2012년1월 76엔대로 떨어졌던 엔·달러 환율이 지난주에는 88엔대까지 올랐다. 일본은 세계시장에서 한국 수출산업의 전통적인 경쟁자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엔·달러 환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06년 100엔당 799원까지 원·엔화 환율이 떨어지는 바람에 경제신문들이 원·엔 비율을 10대1선이 돼야 국제 경쟁력을 지킬 수 있다고 아우성을 쳤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이후 원·엔화 비율은 크게 요동쳤다. 2007년과 2012년 10월을 비교하면 엔화값이 약 20% 오른 반면 원화값은 18.7% 떨어져 엔화 대비 원화값이 약 40% 절하된 것이다.
이런 환율 변화는 세계적 재정위기 속에서 일본에 안전추구 자본이 몰려든 것과 한국의 이명박정부의 고환율(원화 절하)정책이 맞물려 이뤄진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2008년 1월부터 6월까지 원화값이 17.2% 떨어지면서 소비자물가가 5.5% 올라갔다. 물가 급등에는 고유가의 영향도 있었지만 수출드라이브를 위한 환율정책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 고환율로 인해 자동차와 전자 등 수출업종은 수출호조에 힘입어 좋은 실적이 기대된다는 게 신용평가기관 등의 시선이다. 선적 작업중인 국내 생산 자동차

이 모든 것은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의 주도로 이뤄졌다. 강만수씨는 IMF사태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무리한 원화값 방어정책을 펼치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관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씨는 이후 재야에서 “고환율정책을 썼더라면 IMF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명박 대선 후보의 ‘경제과외교사’로서 같은 내용을 주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강만수씨가 대통령직인수위원과 경제총수를 맡으면서 평소의 지론을 실행했던 것이다.

지난해 대선 선거연설에서 박근혜 후보는 “참여정부는 민생에 실패했고, 이명박정부도 민생에 실패했다”고 되풀이 말했다. 해석은 자유지만 다음과 같이 풀이해 볼 수 있다. 즉, 노무현정부는 삼성 등 재벌들의 정책건의에 휘둘려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비정규직 양산 등 소득 양극화를 불러왔다. 또 이명박정부는 이른바 ‘비즈니스 프렌들리’정책을 통해 재벌을 적극 지원하면서 수출드라이브를 위해 원화값 절하를 유도했고, 이에 따라 물가가 뛰어오르고 서민경제가 더욱 어려워졌다.

2008년 물가 급등에 따라 여론이 나빠지고 일부에서는 이명박과 강만수를 묶어 ‘리만브라더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해 8월 개각을 단행하면서 ‘강만수 퇴진론’을 잠재우기 위해 최중경 차관에게 책임을 지워 교체했다. 결국 강 장관은 이듬해 2월 물러났고 ‘시장의 선택’이라는 윤증현 장관이 취임해 3년 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겨우 1년 동안 경제수장을 지낸 강만수 장관의 긴 꼬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그의 퇴임 후에도 고환율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고환율정책의 문제는 이 정책이 재벌과 수출기업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서민대중에게는 대체로 불리하기 때문이다. 정권교체기가 되면 재벌들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경제연구소와 언론을 중심으로 “환율이 10% 오르면 자동차 수출이 12% 떨어진다”는 둥 협박성 연구와 보도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삼성·현대차의 엄청난 수출실적이 오늘의 서민경제에 과연 어떤 보탬이 됐는가.

IMF사태 이전에는 재벌기업이 성장하면 경기가 좋아져 서민에게도 일자리 창출 등 떡고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삼성·현대는 생산설비를 전 세계에 분산 하고 설비를 자동화하면서 국내에는 대규모 투자를 않고 있기 때문에 국민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일부 계열사와 하청·재하청 기업에는 일부 수익이 돌아간다. 그러나 이들 중소기업은 휴대폰과 자동차 등 일부 품목에 치중돼 있고 전반적 경기 부양에 선도적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저환율로 재벌과 수출 중소기업에 타격이 크다는 것도 과장이 있다. 삼성은 미국시장에서 애플을 누르는 등 프리미엄 브랜드로 성장했고 현대기아차도 ‘글로벌 빅5’의 위치를 굳혔다. 일본의 완성품 제조업체들은 과거의 경쟁력을 잃어버린 상태이고 한국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강화되고 있다. 또 그들은 과거 일본기업들이 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1달러당 239엔에서 88년 128엔으로 3년 사이에 환율이 거의 반 토막 나는 가운데 원가 절감 등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것을 배워야 한다.

최근의 원화 강세는 반드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볼 이유는 더 있다. 첫째, 최근의 원·엔화 환율 움직임은 2007년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둘째, 대기업을 위해 민생을 희생시키는 정책은 이제 멈춰야 한다. 셋째, 가공무역이 주종인 한국은 원화값이 오르면 수입 원자재와 부품값이 떨어져 득을 본다. 이밖에 대기업들은 이미 각종 ‘환 헤지(환율변동대책)’를 강구하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 타격을 받을 일도 없다.

이제는 ‘수출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또 재벌의 이익에 서민의 민생을 희생하는 정책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아주 근본으로 돌아가 말하면, 수출은 수입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 날품팔이 신세를 면하려면 무역흑자를 통해 상당 규모의 외자를 쌓아둘 필요가 있는 것뿐이다. 경제민주화는 순환출자 규제에 앞서 서민경제에 반하는 ‘원저엔고’부터 바꿔야 한다. 이는 물론 원화값을 한없이 올리자는 것이 아니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관료들의 사고를 뜯어고치고, 환율정책에서 ‘강만수의 긴 꼬리’를 잘라내야 한다. 이병효(코멘터리 발행인)  www.commentar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