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자 한기석씨는 왜 뉴욕 지하철역에서 떼밀려 죽었어야 했을까. 또 그것은 우리와 우리 사회에 어떤 물음을 던져줄까.

지난 3일 낮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지역 지하철 49가역에서 퀸즈구역 엘름허스트에 사는 58세의 한씨는 건장한 남자 나임 데이비스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갑자기 떼밀려 선로에 떨어졌다. 그는 선로에서 승강장으로 다시 올라오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약 22초 뒤 역으로 진입한 지하철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30세의 노숙자 데이비스는 그 자리를 떠나 몸을 피했다가 곧 부근에서 경찰에 체포됐고 2급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한편 사건 이튿날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대중지 <뉴욕 포스트>는 한씨가 선로에 떨어져 코앞에 전동차가 들이닥치는 긴박한 순간 플랫폼으로 기어오르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진을 ‘곧 죽을 운명’이라는 자극적 제목과 함께 1면 머리에 실어 공분을 자아냈다. <뉴욕 포스트>는 미국에서 7번째 발행부수를 갖고 있지만 런던의 일간지 <선>처럼 선정보도를 일삼는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의 대표 격으로 전혀 존경할 구석이 없는 신문이다. 다른 매체들은 이 사진을 찍은 프리랜스 사진가가 촬영보다는 한씨 구조를 서둘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하고, 죽음의 장면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저질언론을 매도하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씨는 이날 오전 맨해튼에 있는 뉴욕총영사관에 한국 여권 연장을 위해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고, 1파인트(500ml가량)짜리 조그만 보드카 빈병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사건 당시 술 취한 상태였는지는 부검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한다는 것이다. 피의자 데이비스는 경찰 조사에서 “한씨는 취해서 화를 내고 있었고, 그가 먼저 공격했고 나를 붙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피의자 데이비스가 사건 전 혼자 중얼거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주고 있었고 한씨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나선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재판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미국에서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첫째, 주변의 많은 사람 가운데 왜 도움의 손길이 없었나 둘째, 기자와 언론매체의 윤리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셋째, 사건 직후 많은 사람들이 끔직한 장면에 휴대폰을 들이댄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넷째, 뉴욕 지하철이나 치안당국이 할 일은 없었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절박한 위험에 빠졌을 때 주위 사람의 구조의 의무가 있는가에 대해 적어도 영미법에서는 구조를 하지 않는다고 법적 처벌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그러나 서양문화라고 해서 이를 도의적 책임이라고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불인지심(不忍之心)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에게 고 이수현씨가 있다면 미국에도 2007년 선로에 떨어진 지하철 이용객을 구출한 웨슬리 오트리가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사진가를 탓하기는 좀 어려운 듯한데 신문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보인다. 행인들이 스마트폰을 들이댄 것은 기술과 도덕, 문화의 교차선상에서 좀 더 숙고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싶다. 또 서울 지하철에는 정거장마다 안전자동문이 설치돼 있다는 것이 새삼 다행스럽다. 우리나라 공익요원들은 아마 더 재빨리 긴급사태에 대응했을 것이고 승객들도 미국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을 해본다.

한기석씨와 가족에 대해 깊은 애도와 위안의 말을 드리고 싶다. 1975년 미국의 꿈을 안고 이민을 갔지만 팍팍한 삶을 살았을 한씨는 얼마나 어려웠을 것이며 아무 까닭 없이 느닷없는 비극을 맞은 가족은 그 얼마나 가엾은가. 이런 경우야말로 이웃과 동족, 모국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것 아닐까.
“주위 사람들이 왜 구조하러 나서지 않았는지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짧은 몇 초 동안에 누가 도우려고 했다면 훌륭했겠죠.” 갓 스무살 난 한기석씨 딸 애쉴리의 어른스런 말을 들으면서 그가 대학이라도 끝낼 수 있도록 누가 잘 도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실제 이만은 못해도 비슷한 사건이 더러 벌어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려면 안전시설과 보안요원의 증강도 필요하지만 우범분자들이 공공시설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과 범죄 희생자들에 대한 구휼방안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그롯된 일과 위험한 상황을 보아 넘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잘못을 나무라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시민정신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겨진다.